촛불은 보수 징벌인 동시에
갱생 기회였는데 낡은 이념 못 넘어
최저임금ㆍ교육 개혁 등
정책적 비교와 대안 내놓아야
“정치 행태에 관련해 보수에게 특별히 주문하고 싶은 것은 패배를 받아들이는, 승복과 인정의 민주적 자세입니다. 외환위기를 초래한 뒤 김대중 정부가 출범했을 때 내각 구성이 어려울 정도로 저항하고, 그 다음 대선에서 패배하자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국정농단으로 탄핵을 당했으면서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완강하게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우리 보수는 자기 성찰의 태도가 너무 부족합니다. 노태우ㆍ김영삼 정부 초기의 개혁 드라이브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당시 야당들의 태도에서 크게 배우길 바랍니다.”
유럽 출장 중이어서 이메일로 질문과 답을 주고받은 정치학자 박명림(55) 연세대 교수의 대답은 열정 그 자체였다. 중요한 건 보수냐 진보냐가 아니라 구체적인 성과를 내는 것이며,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양 진영간 사생결단식의 정면대결보다 정책대안을 놓고 경쟁하는 구도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평소 지론이 반영됐다. 그래서 보수에게 전할 말도 이념적 구호대신 구체적 정책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보수의 혁신에 대한 얘기들이 많다.
“이승만ㆍ박정희ㆍ김영삼 정부 당시 집권한 보수세력은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반공, 산업화, 민주화와 세계화라는, 그 당시에 주어진 시대적 국가적 과제에 나름대로는 잘 대응해왔다고 본다. 거기에 비해 이명박ㆍ박근혜 정부는 지나치게 과거 회귀적이어서 새로운 보수 구축에 실패했고, 비극적이게도 둘 다 영어의 신세가 됐다.”
-이번 지방선거는 어떤가.
“두말 할 것 없이 보수의 기록적인 참패다. 앞으로 있을 선거에서 이 정도 참패를 기록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정도의 참패다.”
-패인이 뭘까.
“아직도 촛불, 그리고 탄핵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 같다. 6월 민주화 운동 이후 최대의, 민의폭발 사건이다. 보수에 대한 징벌인 동시에 보수가 갱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고 본다. 탄핵 과정을 돌이켜보라. 촛불을 든 국민, 수사한 특검과 검찰, 탄핵안을 가결한 의회, 탄핵소추를 인용한 헌법재판소 등 모든 헌법 주체들이 다 동의한 사안이다. 다른 걸 제쳐놓고서라도 의회에서 탄핵 찬성표가 234표나 나온 건 6ㆍ29 선언에 버금가는, 보수의 후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탄핵 이후 보수는 놀랍도록 빠르게 과거 행태로 되돌아갔다.”
-문재인 대통령 효과는.
“문재인 정부 초반 국정 의제가 갈등의제가 아니라 비갈등의제였다는 점이 주효했다. 적폐청산, 정상회담, 평화체제와 같은 이슈는 사회경제적 이익을 다투는 영역이 아니어서 지지 수준이 높다. 탄핵의 여파가 있는 상태에서 현 정부를 평가하는 ‘회고적 투표’보다는, 현 정부에 힘을 실어주는 ‘전망적 투표’를 했다. 앞으로 사회경제적 이슈를 다루는 갈등의제들이 더 많이 등장할수록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율은 조정되리라 본다. 문재인 정부에게 이번 선거 결과는 승리지만 동시에 채찍이다. 실질적 개혁을 해내야 한다.”
-보수의 스탠스는 어떠해야 하나.
“이제껏 보수는 냉전과 친미, 반북으로 살았다. 분단과 전쟁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해도, 이제는 민주와 평화, 인권, 화해로 거듭나야 한다. 냉전이 해체되고 민주화된 지 이미 한 세대가 지났다. 영국의 처칠, 독일의 아데나워와 콜, 미국의 닉슨과 부시 정부, 대만의 최근 국민당 정부를 보라. 보수지만 늘 공존, 화해, 평화, 협력을 강조했다.”
-보수 혁신 노력은 있어왔다.
“그 노력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박세일식 보수’ 또한 추상적인 구호와 담론의 나열을 넘어 어떤 전체적인 철학과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보지 않는다.”
-보수는 늘 안보 얘기다.
“안보와 평화는 분리된 게 아니다. 북한은 안보를 위해 경계해야 하는 대상이지만, 평화를 위해 대화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걸 핑계 삼아 민주개혁세력을 종북과 반미로 공격하고 남남갈등을 조장해 정치적 이익을 얻던 시대는 지나갔다. 요즘 20~30대 젊은이들을 만나보면 북한의 핵무장, 세습, 독재, 인권유린에는 명백히 반대하면서도 비핵화, 국제공조, 인도주의, 평화공존은 또 그것대로 인정한다. 그 자세가 바람직하다.”
-우리 보수는 기득권을, 불평등을 옹호한다는 인상도 짙다.
“이건 보수는 물론, 진보도 통렬히 반성해야 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양극화, 불평등화를 보여줬다. 양 진영이 뭔가 치열하게 싸운 것 같지만, 우리 사회의 실질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얘기다. 그런 차원에서 보수가 먼저 나서줬으면 한다. 보수가 좋아하는 이승만 대통령은 진보적 토지개혁과 교육 기적을 이뤘다. 박정희 대통령은 어땠나. 빈곤 퇴치, 교육ㆍ의료 정책에 나름의 공을 세웠다. 보수는 반공주의, 지역주의에 기댈 게 아니라 이런 기억을 되살려내야 한다.”
-지역주의 퇴조도 완연한데.
“지역주의도 사라질 때가 됐다. 그러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투표 때마다 드러난, 쭉 이어진 하나의 흐름이다. 보수의 환골탈태는 이 흐름을 인정하고 지역주의에 기대려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데서 시작된다.”
-보수는 무엇부터 해야 하나.
“일단 철저한 반성과 복기다. 지난 9년간 처참했던 국정 운영 전반을 되돌아봐야 한다. 그 다음 정부 여당의 정책에 대한 지지와 반대의 영역을 섬세하게 구분해야 한다. 야당이라고 무조건 정부 여당과 대립각을 세워선 안 된다. 그 뒤 정책적 비교와 대안을 내놔야 한다. 친북이니 사회주의니, 좌파니 하는 말들은 제발 내려놔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최저임금제, 비정규직 정규직화, 검경 수사권 조정, 교육개혁,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평화, 자치분권, 개헌문제 등에 대해 비교 가능한 정책 대안을 내놔야 한다.”
-이제껏 그저 이념이었는데, 가능할까.
“그래서 이념과 구호를 넘은 정책의 구체성을 갖추라고 보수에게 각별히 요청하고 싶다. 과거에는 군부, 오늘날에는 관료들 없이 한국의 보수정당이 제대로 된 정책을 선보인 적이 있는지, 정책 개발 능력이 있는지 커다란 의심이 든다. 정책 개발 능력이 있어야 상층부, 기득권을 대변하는 극우정당이란 이미지를 벗을 수 있다.”
-쉽지 않아 보인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기회라고 말하고 싶다. 보수 혁신 과정을 잘 이끌어 갈 수 있다면 단번에 보수 내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다. 텅 비어 있기에 선점하기도 좋다.”
-그럴 만한 인물이 있을까.
“새로운 얼굴은 혁신 의지와 방향에 따라 끌어내지는 것이다. 관건은 ‘극우’를 버리고 ‘통합’을 내세울 수 있느냐다.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 내각을 떠올려보라. 이시영, 이범석, 신익희, 조봉암, 임영신 등 공산주의자만 빼고 진보 세력을 모두 끌어안은, 통합 내각이었다. 보수 쇄신은 진짜 그럴 수 있느냐에서 갈릴 것이라 본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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