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벽에 난 구멍이 뭐냐고 묻는데 몰라서 대답을 못했다. 나중에 안내 직원이 6ㆍ25 때 생긴 총탄 자국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19일 숭례문을 찾은 곽태림(46)씨가 석축에 엄지손가락 굵기 만하게 파인 흔적을 만지며 말했다. 김시진(39)씨는 “이런 곳에 6ㆍ25의 흔적이 있다는 것 자체가 역사인데 어디에도 설명이 없어 아쉽다”고 했다.
국보 1호 숭례문에 남아 있는 크고 작은 탄흔은 100여개가 넘는다. 총탄에 의해 파이고 부서진 전쟁의 흔적들은 숭례문 외에도 오랜 세월 한 장소를 지켜 온 고궁이나 교각, 묘비, 동상 등에 무수히 많다. 한국일보 ‘View&(뷰엔)’ 팀이 8일부터 열흘간 서울 도심 20여곳에서 발견한 탄흔만 1,000여개 이상이다.
평화로운 도시에 남은 탄흔의 정체는 무엇일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서울 시내의 탄흔 대부분이 6ㆍ25전쟁 당시 벌어진 시가전과 전투기의 총격으로 인해 생긴 것으로 추정했다.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1950년 9월 인천에 상륙한 한미 연합군이 여러 갈래로 서울을 향해 진격하자 북한군이 본대의 철수 시간을 벌기 위해 시내 곳곳에서 극렬하게 저항했고, 그 과정에서 다수의 탄흔과 포화 자국이 생겼다. 당시 서울 시내의 범위가 이른바 ‘사대문 안’이었던 만큼 탄흔은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6ㆍ25의 탄흔은 북한의 무력 남침의 증거인 동시에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비극의 상처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바라보는 시각은 제각각이지만 전쟁의 참상을 간직한 탄흔이 후대까지 보존하고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산물이라는 데 이견은 없어 보인다. 더구나 최근 종전 선언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한반도에 찾아온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 속에서 68년 전 수도 서울을 꿰뚫은 총탄의 흔적들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7세 때 6ㆍ25전쟁을 겪은 손복환(73)씨는 “탄흔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이 아리다. 이 땅에서 전쟁이라는 참혹한 상황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탄흔이 간직한 아픔을 되새겨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과거 택시 운전을 하며 발견한 탄흔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문성묵 한국국가전략연구원 통일전략센터장은 “탄흔이 생기는 과정에서 희생된 분들 덕분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만큼 그들의 공로에 감사하는 차원에서 몇몇 대표적인 장소라도 고증을 거쳐 관리 보존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은 총체적인 무관심과 방치뿐이다. 취재 결과 문화역284(구 서울역사)와 서대문형무소를 제외하고는 탄흔에 관한 안내 문구 한 줄 찾아볼 수 없고, 시민들은 오해와 궁금증만 품은 채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북한산 비봉에서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진 국보 3호 신라진흥왕순수비마저 총격에 의해 비석이 절단되고 뒷면에 탄흔이 무수히 남았지만 그에 대한 설명은 전무하다. 관리와 보존은 고사하고 독립문과 경회루, 구 한국은행처럼 파이고 깨진 부분을 시멘트나 모르타르 등으로 ‘보수’해버린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발굴조사나 고증도 이루어지지 않다 보니 탄흔의 역사적 가치는 “6ㆍ25 때 생긴 것”이라는 나이 지긋한 안내 직원의 짧은 설명으로 구전될 뿐이다. 뷰엔팀이 국가보훈처와 문화재청, 서울시에 보존 관리 실태를 문의한 결과 하나같이 “탄흔 자체를 다루는 소관 부서가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먼저 6ㆍ25 때 생긴 탄흔이 맞는지 검증을 거쳐 안보 및 사료적 가치가 인정된다는 상당한 제안이 있을 경우 심의위원회를 열어 현충시설로 지정, 관리할 수 있다”면서도 검증이나 제안은 “해당 시설물 관리 주체의 몫”이라고 발을 뺐다.
탄흔의 상당수가 문화재에 남아 있음에도 관람객을 위한 안내판 하나 없는 실태에 대해 문화재청 관계자는 “최근 대통령의 지적대로 어려운 용어 일색에 국민이 궁금해하는 것을 담지 못한 안내판의 개선 계획을 수립 중”이라며 “여기에 탄흔에 관한 설명도 반영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시멘트나 모르타르로 칠하거나 메워 놓은 경우도 구조상 문제가 없는 선에서 원상태로 복구하겠다”고 밝혔다.
◆그 많은 탄흔들은 어디서… 대부분 ‘9ㆍ28 수복’ 과정서 생겨◆6ㆍ25전쟁 발발 3일 만에 한강 이남으로 밀려난 국군은 영등포와 노량진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적의 도하를 막는 데 주력했다. 6일 동안 이어진 한강선 전투의 흔적이 지금도 한강대교(당시 한강인도교) 교각과 철골 구조물, 표지석 등에 남아 있다.
그 외 서울 도심에 남아 있는 탄흔 대부분은 ‘9ㆍ28 수복 작전’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추정했다. 국방부가 펴낸 ‘한국전쟁사’ 및 전쟁기념관이 작성한 ‘전투 정보’를 참고해 탄흔이 발견된 장소를 중심으로 당시 시가전 상황을 정리했다.
탄흔 따라가면 당시 아군의 서울 진입 상황 보여 서대문형무소에는 1000개 이상… ‘치열한 전투’ 흔적1950년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한 연합군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뉘어 서울을 향해 진격했다. 영등포 지구를 점령한 본대가 수색을 거쳐 무악재를 넘어 서대문으로 진출하고 본대에서 갈린 병력은 용산을 지나 서울역에 다다랐다. 안양과 수원을 거쳐 서빙고로 도하한 병력은 남산을 점령한 후 동대문과 낙산 방면, 또는 광진구와 중랑구를 거쳐 용마산 방면으로 밀고 올라갔다.
서울 수복작전의 본대이자 국군 해병 연대가 배속된 미 해병 제1사단이 서벽에 다다른 것은 22일. 일명 ‘연희고지’라고 불리는 서벽은 서대문 안산 일대에서 연세대 뒷산을 거쳐 한강변까지 이어지는 능선을 말하는데, 당시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서벽 전투는 3일 동안이나 이어졌다. 당시 격전의 흔적은 은평구 증산교와 연세대 등에 남았다. 서벽을 함락하고 서대문 네거리로 향하던 본대는 25일 독립문 부근에서 또다시 적군과 맞닥뜨렸다. 서대문 형무소 곳곳에 남은 1,000개 이상의 탄흔이 당시 치열했던 시가전을 증언한다. 이후 서대문 네거리까지 진출한 본대는 아현동을 거쳐 온 병력과 합류해 새문안길과 세종로 방면으로 진격했다.
용산과 삼각지를 지나 서울역에 다다른 병력은 의주로와 서소문, 태평로를 거쳐 덕수궁을 접수했고, 일부는 숭례문에서 남대문로와 소공로를 향해 진격했다. 당시 북한군은 중앙청으로 향하는 길목에 300m마다 교차 바리케이드와 지뢰를 설치하고 대전차포, 기관총, 박격포 등으로 맞섰지만 27일 결국 궤멸되고 만다. 이 과정에서 사대문 안은 쑥대밭 됐고 서울역과 숭례문, 한국은행, 덕수궁,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등에 무수한 탄흔이 생겼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김희지 인턴기자(이화여대 사회학과 3)
인터렉티브 제작 미디어플랫폼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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