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병 희생 잊은 대한민국]
6ㆍ25 위령제에 참석한 노병들
총알받이 된 동료 회고하며 눈물
아직 전사자 집계도 제대로 안돼
정확한 날짜가 기억나지는 않는다. 1950년 7월 혹은 8월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피난민들이 머물고 있던 경북 영천시 신령면 개울가에 총을 찬 청년 3, 4명이 들이닥쳤다.
‘올게 왔구나!’ 개울가에는 당시 16살이었던 박우상(84)씨도 있었다. 강원도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전쟁 소식에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오른 뒤 몇 주를 걷다 이제 좀 쉴 참이었다. 박씨 주변으로는 피난민이 개울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여름에 겪어야 할 노숙이었으니 다들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화장실도 따로 없어 여자들은 개울가 근처에 홑이불로 엉성하게 가린 간이 화장실에서, 남자들은 인근 풀숲에서 볼일을 보곤 했다. ‘또 가야 할 테니까 쉴 수 있을 때 푹 쉬어’ 그나마도 다음엔 어디로 쫓겨 내려 가야 할지 다들 머리 속이 복잡했다.
박씨는 총을 찬 청년들이 왜 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들이 경찰이라고 했고, 또 다른 이는 군인이라고도 했다. 이들 존재는 이미 피난민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걷는데 지장 없고, 키가 150~160㎝ 정도만 되면 무작정 끌고 간다고 했다. 그는 “군인이 부족해서 젊은 남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병력으로 차출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며 “언제 올까, 언젠가는 오겠지, 그런 생각에 며칠 밤을 꼬박 새운 상태였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총을 든 청년들이 박씨 앞에서 멈춰 섰다. “신분증 내놔!”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끌려 가겠구나 싶었지만 거부할 수도 없었다. 청년들 표정은 엄하기만 했다. 박씨 가족도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며칠 전에 누가 안 가겠다고 버티다가 총을 맞았다’는 누군가의 전언이 갑자기 떠오르면서 침이 바싹 말랐다. 마침내 강원도에서 다녔던 중학교 학생증을 보여주자, 한 청년이 보는 듯 마는 듯 받아 들고는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따라오라”고 했다. 한참을 걸어 공터에 도착한 뒤에야 학생증을 돌려줬다. 그곳엔 박씨와 같이 앳된 얼굴을 하고 있던 학생 수십명이 이미 오와 열을 맞춘 채 서 있었다.
만 18세 안 된 나이에 군 징집
6ㆍ25 참전 소년병 2만9604명
군번 확인된 전사자만 2573명
“성장기에 40㎏ 군장ㆍ110㎝ 소총
전쟁 때문에 키 안크고 몸 약해져”
“사회 보호 받아야 할 나이에…
국가가 우리 인생 망쳤다”
그 길로 부산에 있는 훈련소로 이동했다. 형식상 신체검사가 있었지만, 150㎝가 조금 넘는 그의 키는 문제가 안 됐다. 단 한 명도 나이를 묻는 이가 없었다. 총 찬 청년들 눈에 띈 그 순간, 이미 군인이 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박씨는 그렇게 소년병이 되었다.
2018년 6월 21일 오전. 대구 남구 앞산공원 낙동강승전기념관 강당으로 80~90세 정도가 보이는 남성 70여명이 노구를 이끌고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이들을 향해 예를 갖추는 군인 모습도 보였다. 노인들은 모두 박씨와 마찬가지로 만 18세가 안 된 나이에 군으로 징집돼 6·25전쟁에 참가해야 했던 소년병. 전쟁 중 사망한 전우를 기리기 위한 6ㆍ25 참전 순국소년병 합동위령제에 참석하기 위한 걸음이었다.
“국가와 사회로부터 우선적으로 보호받으며 가정에서도 부모님과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학업에 전념해야 할 열 다섯에서 열 일곱 청소년 신분으로, 책가방도 청운의 꿈도 일순의 영달도 버리고 군번 계급을 받은 정규군인이 되어 전쟁터로 달려 갔습니다” 은빛 머리 위로 흰색 모자를 눌러 쓴 박태승(85) 6ㆍ25참전소년소녀병전우회장이 추모사를 담담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박씨와 같이 ‘강제로 징집됐다’는 소년병이 대부분지만, 자원입대를 했다는 이들도 있다. 전쟁 당시 대구에 살던 최태도(84)씨는 전쟁 발발 이후 절친한 친구가 스스로 군에 입대하자, 영웅심이 발동해 50년 8월 자원입대를 신청했다. 군인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당시 군당국은 나이를 따지지 않았다.
이후 최씨는 수성구에 있던 한 중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총탄이 무차별로 오가는 전쟁터로 투입되기에 앞서 배운 최소한의 교육이었다. 짧게는 3일, 길어봐야 7일 총 쏘는 법과 M1 소총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법, 간단한 제식과 군사 전술 훈련 정도를 배운 뒤 소년병들은 전쟁터로 나갔다. 최씨는 “훈련이 끝나자 마자 바로 군번을 받았다”고 했다.
이들 다수는 당시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낙동강 전선에 배치됐다. “소년병들은 사실상 총알받이였다”던 이순경(85)씨도 그 중 한 명. 그는 “총탄이 쏟아지는데 군인이라고 해서 무섭지 않았겠나. 결국 계급 순으로 순서를 짜서 맨 아래 계급이 제일 앞장서기 일쑤였다”고 했다. 당연히 소년병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장 어린 신참, 그들은 그렇게 가장 최전방으로 내몰렸다. 박씨 역시 이씨와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고참들은 앞으로 잘 나가지 않으려고 해서 전투경험이 별로 없는 신병들이 앞장설 수밖에 없었다”며 “어떤 날은 신병 10명이 들어왔는데 다음날 보니까 한 명만 살아남아 있더라”고 떠올렸다.
그래도 이들은 죽기살기로 싸웠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생각은 총소리가 울리는 그 순간 머리 속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싸우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으니 살려고 싸웠다고 한다. “여기서 잘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생각으로 싸웠다”는 얘기다.
낙동강 전투에서 살아 남은 소년병은 전세에 따라 한반도 전역을 누볐다. 그들 몸에는 언제나 40㎏이 넘는 군장과 110㎝에 달하는 M1소총이 항상 붙어 있었다. 정임득(84)씨는 “키와 총신이 별로 차이 나지 않는 소년병도 있었다”고 했다.
물론 모든 소년병이 전방에 배치됐던 건 아니다. 군 간부 중 ‘빽’이 있었던 최씨는 통신병으로 발령 받아 복무하다가 50년 12월 제주도로 가 훈련소 창설에 일조했다고 했다. 최씨는 군법, 사격, 각개전투 등 조교로 일하며 새로 입대하는 군인들을 교육했다. 당시 제주도 훈련소엔 제대로 된 건물도 갖추지 않아 비가 오면 24인용 천막에 120여명이 들어가야 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고 한다.
이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1ㆍ4 후퇴를 꼽았다. “강원 화천군에서 경북 의성군까지 열흘 넘게 걷고 또 걸었다”고 했다. 그 동안 신발 한 번 벗지 못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했다. 이씨를 포함한 소년병은 다른 일반 군인 사이에 껴서 길바닥에서 엎어져 자다 다시 행군했다. 키가 작다고, 나이가 어리다고 전쟁은 봐주지 않았다.
이들은 “전쟁과 징집이 인생 전체를 바꿔놓았다”고 입을 모았다. 무엇보다 학생으로서 배워야 할 시간을 잃어버렸다는 게 한스럽기만 하다. 박씨, 정씨는 54년 제대한 뒤 고향으로 돌아간 뒤 평생 농민으로 살았다. 이들은 “전후 한국엔 공장도, 아무런 산업도 없었다”며 “중등교육도 마치지 못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농사일밖에 없었다”고 했다. 키가 160㎝라 ‘꼬마’로 불렸다는 문동숙(84)씨는 “책가방 대신 총 들고 싸우느라 무식해서 한 평생 못 먹고 못 살았다”며 “군대에서 편지 쓸 때도 소대장이 대신 써줘야 했다”고 말했다. “한창 성장기일 때 무거운 군장을 메고 다녔으니 전쟁 때문에 키가 안 크고 몸이 약해진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미군 부대 노무자로 일을 하다 요식업을 했다는 최씨는 “아내 음식 솜씨로 식당을 어찌 운영하긴 했지만 난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건달에 불과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전쟁 중 간부후보생에 지원해 63년 중위로 전역한 이씨는 위령제를 마치고 강당을 나서며 한 마디를 던졌다. “누구나 겪었던 전쟁이었고 그래서 다들 피해자였다고 하지만 소년병 하나하나가 어떤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국가가 그들의 인생을 망친 겁니다.”
국방부가 군번상으로만 파악하고 있는 6·25전쟁 참전 소년병은 2만9,604명. 이 중 확인된 전사자가 2,573명. 그러나 신원 파악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던 당시 사정을 고려하면 그보다 훨씬 많은 소년병이 이름 없이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찬가지로 생존해 있는 소년병 숫자조차 모호하다. 공식적으로 집계에 나선 적이 없어서다. 이 나라는 68년 동안 그들을 외면해왔다.
대구=손영하 기자 froze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