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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건물엔 젠트리피케이션 없다” 해방촌의 천사들

입력
2018.06.30 09:0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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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흥시장 터줏대감 장인순 할머니 

 중개업소 ‘월세 100만원’ 권유에도 

 5년 전 임대료 그대로 가게 내놓아 

서울 경리단길과 이태원의 대체상권으로 떠오른 해방촌에 젠트리피케이션 해방구가 열렸다. 해방촌 신흥시장 임대인들이 6년간 임대료 인상을 자제하는 상생협약을 맺고 임차인과 공생을 다짐하면서다. 지나친 임대료 인상은 공멸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널리 전파하는 이들. 신흥시장의 건물주 장인순, 박일성, 김정남씨가 세입자인 김새롬, 장경훈씨(앞줄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와 신흥시장 입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서울 경리단길과 이태원의 대체상권으로 떠오른 해방촌에 젠트리피케이션 해방구가 열렸다. 해방촌 신흥시장 임대인들이 6년간 임대료 인상을 자제하는 상생협약을 맺고 임차인과 공생을 다짐하면서다. 지나친 임대료 인상은 공멸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널리 전파하는 이들. 신흥시장의 건물주 장인순, 박일성, 김정남씨가 세입자인 김새롬, 장경훈씨(앞줄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와 신흥시장 입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요즘처럼 세가 비싸면 못 살았지. 남들 보니 세를 많이 받던데, 내 생각만 하면 되나. 세 얻는 사람도 벌어 나가야 된다는 생각을 해야지.”

서울 남산자락 용산2가동 일명 해방촌의 신흥시장 터줏대감인 장인순(89) 할머니는 올해 초 자신 명의의 건물 1층 점포(35.7㎡ㆍ11평)를 부동산에 내놨다. 반찬가게를 운영하던 세입자 아주머니가 건강이 나빠져 장사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하면서다. 그런데 할머니가 제시한 임대료가 기가 막힌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50만원. 해방촌이 뜨기 전인 5년 전 임대료에서 한 푼도 오르지 않은 그대로다. 인근 부동산이 무조건 “월세 100만원은 받아라”고 했지만 할머니는 단칼에 잘랐다. “쓸데없는 소리하네.”

할머니의 건물이 자리한 해방촌 신흥시장 일대는 최근 이태원과 경리단길의 대체 상권으로 부상하면서 상가 임대료가 들썩이고, 그 임대료를 감당 못 하는 상인들이 내쫓기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ㆍ둥지내몰림)이 슬금슬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러 TV 예능 프로그램에 잇따라 시장이 노출되면서 할머니 건물 주변엔 사람들의 발길이 크게 늘고 있다. 눈 딱 감고, 중개인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을. 할머니는 그러나 ‘젠트리피케이션 해방구’를 지키는 해방촌의 ‘천사 건물주’로 기억되기를 자청했다.

서울 용산구 해방촌 신흥시장의 목 좋은 점포를 임대하며 이전 세입자와 동일한 조건을 제시한 장인순 할머니와 점포(나무 카페) 임차인 장경훈(왼쪽)씨가 함께 미소를 짓고 있다. 배우한 기자
서울 용산구 해방촌 신흥시장의 목 좋은 점포를 임대하며 이전 세입자와 동일한 조건을 제시한 장인순 할머니와 점포(나무 카페) 임차인 장경훈(왼쪽)씨가 함께 미소를 짓고 있다. 배우한 기자

서울 을지로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장경훈(39)씨의 눈에 장 할머니가 내놓은 가게가 들어온 것은 대단한 행운인 셈이었다. 그는 도심 번화가 지하의 좁은 공간을 벗어나 따사로운 햇살 아래 로스팅할 여유로운 곳을 찾아 해방촌을 뒤지던 중이었다. “단골손님이 신흥시장에서 공방을 운영해 알게 된 동네인데, 첫눈에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어요. 카페 자리가 있나 부동산에 갔는데 마침 당일 나온 물건(장 할머니의 점포)이 있더라고요. 보자마자 바로 계약금을 걸었어요. 입지나 크기에 비해 정말 매력적인 조건이었죠.” TV 음식 프로그램 제작진이 식당을 열 장소로 탐냈는데, 장씨가 한발 앞서 계약하는 바람에 포기했다는 얘기도 나중에 들었다. 신흥시장의 명소가 된 ‘나무 카페’는 이렇게 탄생했다. “계약기간이 2년이지만 계속하라고, (할머니가) 그저 월세만 꼬박꼬박 달라고 하세요. 중간에도 막무가내로 임대료를 올리는 건물주들이 있는데 복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번화가 건물 지하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장경훈씨는 장인순 할머니 덕분에 따사로운 햇살 아래 로스팅과 나무작업을 할 장소를 좋은 조건에 찾게 돼 행운이라고 말했다. 배우한 기자
번화가 건물 지하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장경훈씨는 장인순 할머니 덕분에 따사로운 햇살 아래 로스팅과 나무작업을 할 장소를 좋은 조건에 찾게 돼 행운이라고 말했다. 배우한 기자

장 할머니가 1층 점포의 가치를 몰라서일까. “욕심내서 100만원 받으면 나야 좋겠지. 그런데 장사가 그리 많이 남는 게 아니야. 우리보다 두세 배씩 받는 곳들도 있던데 어떻게 세를 낼지 걱정이야.”

할머니에게는 힘들게 장사를 시작했던 기억이 깊게 남아있다. 큰딸이 네 살이 되던 1960년 해방촌에 들어와 물도 나오지 않는 흙집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노점에서 두부, 콩나물, 미역을 팔았는데, 한 푼 없이 시작한 장사라 아는 집에서 돈을 꿔 물건을 샀다. 드디어 흙집을 허물고 2층 벽돌집을 지을 때도 “남의 돈이 무서워” 증축은 생각도 안 했다. 할머니는 위층을 살림집으로 쓰고 아래층에 포목점을 열어 5남매를 길렀고, 일흔 중반이 돼서야 일을 접고 세를 놓았다. 침체했던 동네에 최근 활기가 돌아 기쁘다는 할머니는 시장에 젊은이들이 많이 찾아 동네가 북적북적해지길 소망했다. 장씨가 ‘오가며 카페에 들러 한 잔씩 드시라’고 권해도 “노인네 있으면 손님 오는데 도움 안 된다”고 손사래 친다.

 건물주 전원 ‘6년간 임대료 동결’ 협약 

“60년대에는 해방촌 시장이 유명했지. 이태원, 후암동에서 몰려와 여기서 사가고 시장이 워낙 붐벼 쓰리꾼(소매치기를 뜻하는 속어)이 있을 정도였어. 두서너 집에 하나씩 스웨터 공장이었고 평화시장, 동대문시장에서 물건을 떼갔지. 그런데 90년대 중국과 국교를 맺으면서 공장이 값싼 인건비를 찾아 떠났고, 대형할인매장 붐까지 일면서 재래시장이 다 죽었지.”

신흥시장 상가운영회장인 박일성씨는 2016년 11월 '6년간 임대료 동결'을 다짐한 신흥시장 상생협약에서 임대인 대표로 서명했다. 배우한 기자
신흥시장 상가운영회장인 박일성씨는 2016년 11월 '6년간 임대료 동결'을 다짐한 신흥시장 상생협약에서 임대인 대표로 서명했다. 배우한 기자

해방촌을 젠트리피케이션 해방구로 지켜가려는 건물주는 장 할머니뿐만이 아니다. 60년 전 부산에서 상경해 신흥시장의 흥망성쇠를 온몸으로 겪어온 박일성(76) 상가운영회장은 기나긴 침체기를 벗어나 시장이 살아나는 게 반갑다고 했다. 소유 건물에서 국수 공장과 상점을 운영 중인 그는 2016년 11월 ‘6년간 임대료를 동결하겠다’는 상생협약 체결 당시 임대인 대표로 서명한 당사자다. 상생협약은 서울시와 용산구청, 임대인, 임차인이 맺은 자율 협약인데, 당시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기간보장 5년, 차임인상 최대 9%)보다 임차인 권리를 더욱 보호한 내용이었다. 이 협약을 통해 임차인들은 향후 6년간 임대료 걱정 없이 장사할 수 있게 됐다. 신흥시장의 건물주 44명이 전원 동참했는데, 건물주 상당수가 50년 넘게 고락을 함께한 관계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장인순 할머니도 그중 한 명이다.

 #2 

 임대료 동결 이끈 박일성 상가회장 

 “내 건물인데 왜? 처음엔 다들 반대 

 비싼 임대료는 주로 외부인 건물” 

당시 신흥상권으로 부상한 해방촌 일대는 2015년 서울시 도시재생사업에 선정되는 호재까지 맞았다. 환경개선 기대감과 함께 임대료가 치솟을 조짐이 나타났고 젠트리피케이션 우려도 커졌다. 시에서 먼저 움직였다. 공공재를 투자해 소유자들이 혜택을 보는 만큼 임대료 상승을 억제하자며 건물주들을 상대로 설득에 나선 것이다. 박 회장은 “임대료가 오를 때 오르더라도 갑자기 오르면 임차인이 곤란하지 않겠냐는 건데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처음에는 “내 건물인데 내 마음대로 못하느냐”라며 반대도 많았지만 결국 전원 동의를 받아냈다. “홍대나 이태원을 봐라, 지나치면 세도 안 나가고, 상가도 죽고, 자기 무덤 파는 것이라고 설득했지.”

60년대부터 인연을 이어온 해방촌 신흥시장의 건물주들은 “시장이 먼저 살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강하다. 지난 28일 한 자리에 선 박일성, 김정남, 장인순씨(왼쪽부터)는 "함께 늙어가는 사이"라고 말했다. 배우한 기자
60년대부터 인연을 이어온 해방촌 신흥시장의 건물주들은 “시장이 먼저 살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강하다. 지난 28일 한 자리에 선 박일성, 김정남, 장인순씨(왼쪽부터)는 "함께 늙어가는 사이"라고 말했다. 배우한 기자

 외부인 건물주 증가…혜택 못 받는 임차인도 

2년여가 흐른 지금 상생협약은 얼마나 지켜지고 있을까. 그새 신흥시장에는 월세 10만~20만원 하던 쪽방들이 사라졌고, 창고이거나 살림집이었던 곳마저 하나둘 점포로 바뀌었다. 박 회장은 “기존 건물주들은 잘 지키고 있다”고 자신했지만 걱정은 외부에서 집을 산 경우라고 했다. 건물주는 44명에서 39명으로 줄었고, 이 중 12명이 외부인으로 바뀌었다.

그는 “새로 들어온 주인 가운데 ‘살려면 사고 말려면 말아라’ 식으로 내놓은 곳이 몇 곳 있다. 우리가 볼 때는 너무 값이 세다 싶은데 외부인이라 만날 기회가 별로 없고, 개인 재산이니 ‘적당히 받으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씁쓸해했다. 박 회장은 앞으로도 시장이 번성한다 해도 시장 수준에 맞게 임대료를 책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욕심만 앞세워 임대료를 크게 올리면 세입자도 못 버틸 뿐 아니라 주변 시세를 높여 빈 점포가 늘고 상권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신흥시장 소개 TV 프로그램 방영이 끝나고 월세 170만원에 임대된 곳이 있어. 아직 그 정도 수준은 아닌데 시세를 잘 모르는 건지. 1, 2년은 버티더라도 보증금 다 잃고 접을까 걱정이죠.”

이어 점포를 알아보는 이들에게 부동산에 들르기 전 상인회를 먼저 찾으라고 충고했다. 적정 월세가 얼마인지 알아봐야 한다는 얘기이다. “60만원이 적정선이래도 부동산에서 70만원이 시세라고 하면 건물주는 알고도 넘어가고 모르고도 넘어가요. 적정선을 알아야 건물주와 흥정할 수 있는 일이지.”

그는 지난해 4월 반지하 1층(20㎡) 점포를 임대하면서 부동산을 거치지 않았다. ‘허니비쥬얼리디자인’의 한은희(43)씨는 점포에 붙은 ‘임대’ 종이를 보고 연락했고, 3년간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20만원 조건으로 두 사람이 직접 계약서를 썼다.

박일성씨가 임대 중인 점포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씨는 이날 외국 체류 중이라 촬영에 참석하지 못했다. 배우한 기자
박일성씨가 임대 중인 점포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씨는 이날 외국 체류 중이라 촬영에 참석하지 못했다. 배우한 기자

“주인아저씨께서 ‘젊은이들이 함께 살려면 초기비용이 적어야 하고, 그들만의 수익 창출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해 안심돼요. 기존 건물주들은 ‘그래야 젊은이도 살고 시장도 살고 건물 가치도 올라가며 공생한다’는 공감대가 있어요.” 다만 한씨는 “강남권에 살면서 새로 이곳 건물을 매입한 외부 출신 주인들이 월세를 높이고 있다”라며 상생 협약의 혜택을 받은 임차인도 있고 아닌 이들도 있다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기존 건물주들 “동네 먼저 살아야” 공감대 

“재계약 어떻게 되나요.” “응, 내가 이틀 있다 갈게.”

나무 카페에서 대각선 방향 건물 1층에 위치한 ‘바시아쥬얼리’의 김새롬(28)씨는 점포 계약기간을 한 달 남긴 지난 2월 임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씨는 2016년 3월 30㎡(약 9평) 매장을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40만원 조건으로 2년 계약했다. “가슴이 콩닥콩닥했어요. 제가 계약하고 얼마 안 있어 상생협약식이 있었지만 그동안 새로 오신 분들 인사를 하면 (임대료가) 저희의 두 배, 세 배 많은 경우도 있더라고요. ’아무리 상생협약 했어도 주변 상권이 이런데 이 정도 월세가 말이 돼?’ 싶었어요.”

김씨는 전화를 끊고 ‘이번 달부터는 얼마로 해줘’라고 하면 어쩌나, ‘최대 얼마까지 가능할까’ 가늠하며 마음을 졸였다. 그런데 다시 울리는 전화기. “뭘 써, 그냥 연장하면 되는 거지.” 뛸 듯이 기뻤다. 재계약을 하지 않으면 묵시적 갱신이 돼 기존 조건 그대로 계약이 연장된다. “상생협약을 지키고 계시는구나. 너무 감사했어요. 나중에 옆 가게 캔들 오빠, 도자기 언니네도 묵시적 갱신 중이라는 얘기를 듣고 마음이 놓였어요.”

 

 #3 

 월세 40만원에 재임차 김새롬씨 

 “주변 2, 3배 올라 재계약 걱정 중 

 ‘그냥 연장하자’ 묵시적 갱신 기쁨” 

정작 건물주 김정남(76)씨는 “나도 세를 얻어봤는데, 세 얻어 사는 사람들은 올린다고 하면 마음이 뜨끔뜨끔해. 알아서 올려주면 감사하게 받겠지만, 나는 뭐 처분만 바라는 거지”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60년대부터 시장에서 제과점을 운영했던 그는 “임대료를 자꾸 올리면 홍대도 그랬고 경리단도 그랬고, 우리 동네에 안 좋다”고 덧붙였다.

신흥시장의 건물주 김정남(왼쪽)씨는 지난 3월 ‘바시아쥬얼리’의 임차인 김새롬씨와 계약기간이 만료하자 이전 조건으로 계약이 연장되는 ‘묵시적 갱신’을 했다. 배우한 기자
신흥시장의 건물주 김정남(왼쪽)씨는 지난 3월 ‘바시아쥬얼리’의 임차인 김새롬씨와 계약기간이 만료하자 이전 조건으로 계약이 연장되는 ‘묵시적 갱신’을 했다. 배우한 기자

몇 집 건너 한 상점도 4년째 같은 월세를 내고 있다. 2015년 11월 월세 30만원 조건으로 1년 계약을 맺었지만 재계약 없이 매년 묵시적 갱신 중이다. 상점 주인은 “처음 계약기간이 끝났던 2016년 말 집주인에 재계약을 타진했더니 ‘계약서를 안 써도 같은 조건으로 연장된다’고만 하셨어요. 지난해에도 그대로 갱신됐죠”라고 말했다.

해방촌 도시재생센터의 이봉길 사무국장은 기존 건물주들은 상생협약을 준수하려는 의욕이 강하다고 말했다. “경리단의 폐해를 다 알아 ‘올리면 죽는다’는 공감대가 있습니다. 대부분 오래 사신 분들이고 동네가 먼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죠. 우리 사무실도 시세가 월세 120만원인데 ‘시장이 좋아지는 일을 한다니 나도 일조하겠다’라며 주인이 80만원으로 낮춰주셨죠.”

 “임대료 인상 가이드라인 만들 필요” 

1964년 준공업지역으로 지정된 서울 성동구 일대는 90년대 이후 상대적으로 낙후된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2005년 서울숲이 개장하고 2012년에는 지하철 분당선이 개통되며 서울숲을 중심으로 한 일대가 명소로 떠올랐다. 지하철 2ㆍ7호선 역세권인 방송대길, 상원길 상점들도 덩달아 임대료가 오르기 시작했다. 젠트리피케이션 조짐이 보이자 2015년 12월 구청의 중재 아래 임대료 인상을 자제하자는 상생협약이 체결됐고, 지난해까지 해당지역 건물주 63.9%가 동참했다.

서울 성동구 방송대길 소유 건물의 1층을 임대하면서 5년간 임대료 동결을 선언한 지준기(오른쪽)씨와 ‘계란의 변신’ 김영래씨가 함께 하트를 그리고 있다. 고영권 기자
서울 성동구 방송대길 소유 건물의 1층을 임대하면서 5년간 임대료 동결을 선언한 지준기(오른쪽)씨와 ‘계란의 변신’ 김영래씨가 함께 하트를 그리고 있다. 고영권 기자

상생협약에 서명했던 지준기(59) 세실섬유 대표는 지난해 3월 방송대길에 위치한 소유 건물 1층 점포(76㎡ㆍ약 23평)를 임대했다. 부동산은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 250만원을 제안했지만 보증금 2,000만원, 월세 200만원에 계약했다. “젊은 총각이 장사를 시작한다니 힘을 보태고 싶었다”라며 인테리어 공사 동안(2달) 월세도 받지 않았다. 올해 3월이 다 되어서야 계약기간이 1년인 걸 알았다는 그는 재계약을 따로 하지 않아 같은 조건으로 계약이 연장됐다. “임대료를 올릴 생각이 없는데 매년 계약서를 쓸 필요가 있나요. 이곳에서 10년쯤 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5년은 자리 잡고 5년은 벌고요.”

 #4 

 5년간 임대료 동결한 지준기 대표 

 “사글셋방서 쫓겨났던 아픈 기억 

 인상 전에 장사 잘 되는지 살펴야” 

지 대표는 고향인 강원 평창군에서 차비만 들고 상경해 1982년 서울 성수동에 자리잡았고, 88년 지금의 건물을 세워 사무실 겸 작업장으로 사용 중이다. 아이가 운다고 사글셋방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는 그는 세입자의 설움을 잘 알고 있다. “1년마다 임대료 상한치까지 꼬박꼬박 올리는 못된 건물주들이 있어요. 인상에 앞서 그만큼 장사가 되는지부터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세를 받는 것도 떳떳하죠.”

지준기씨는 "건물주라고 무턱대고 임대료부터 올리지 말고 먼저 장사가 되는지부터 살펴야 한다"고 했다. 고영권 기자
지준기씨는 "건물주라고 무턱대고 임대료부터 올리지 말고 먼저 장사가 되는지부터 살펴야 한다"고 했다. 고영권 기자

그러면서 임대료를 건물주 마음대로 올릴 수 없도록 구청 등 지역 단위로 인상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두 사람 마음대로 올려도 그게 시세가 돼 빈 가게를 양산하고 상권이 죽는 악순환이 시작된다”는 이유다. 또 재건축 등 임대인 사정으로 세입자를 내보낼 때는 법으로 이사비용 지급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임대료 5개월 치는 줘야죠. 다른 곳에서 새로 시작하면 또 비용이 들잖아요. 그 돈을 받는다 해도 사실 받는 게 아니죠.”

세입자인 ‘계란의 변신’ 김명래(43) 사장은 “동네가 계속 뜨고 있는데도 5년간 임대료가 동결이라니 일에만 집중할 수 있어 안심된다”고 말했다. 김씨 주변에는 재계약 때마다 속으로 끙끙 앓는 친구들이 많다. “건물주들이 욕심부리기 시작하면 막을 방도가 없죠. 상생협약이 사실 법적 강제성이 없는데도 지키는 게 감사하고 존경스러워요.”

송은미기자 mys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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