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걸어서 삼사십 분 걸리는 그 길을, 늘 그래왔듯, 버스를 타는 대신 하드를 하나 사서 입에 물고, 신발주머니를 휘휘 돌리며 흐느적 걷는 길. 주택가를 벗어나 개천 다리를 건너 밭인지 야적장인지를 지나 야산 언덕 집까지. 여덟 살짜리 계집애가 동무도 없이 혼자 걷는 그 길은 참으로 지루하고도 먼 길. 그것은 단물 빠진 하드 나무막대의 맛. 막대에 붙었던 차고 단 그것은 누가 다 먹었나. 뭐 주워갈 건 없을까, 괜히 땅바닥에 박힌 병뚜껑이나 파내 주머니에 담으며 걷는 길. 그러던 어느 날 재미난 일이 생겼다.
어디론가 허둥지둥 달려가는 아줌마들. 달뜬 기운이 요상했다. 뭐예요? 무슨 일이에요? 뭐냐구요? 저기 파밭 주인이 밭을 그냥 갈아엎는다는구나. 파 값이 똥값이라고. 엎기 전에 누구라도 와서 파 가란단다. 너도 얼른 가서 뽑아다 엄마 갖다 드려. 파라구요? 파? 그걸 어디다 쓰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합류하고 보자. 우선 신발주머니를 채우고, 어른들 하는 것처럼 뽑고 털어 집어넣고, 어이쿠 어린애가 손도 야무지네, 길가에 날아다니던 구멍 난 비닐봉지를 주워와 쑤셔 넣고, 우와 왕건이를 건졌구나, 외투 호주머니에도 밀어 넣고, 그렇게 두둑이 챙긴 전리품을 갖고 집으로 향하는 길, 불현듯 걱정이 밀려왔다.
‘만날천날 추접스러운 쓰레기만 주워 오지 말고 쫌!’ 생생한 엄마 목소리. 병뚜껑이건 깨진 유리조각이건 녹슨 철통이건, 주워가는 족족 ‘쓰잘데없는’ 딱지가 붙는데. 하물며 길에서 만난 떠돌이개를 끌고 갔다가 개랑 같이 쫓겨날 뻔했던 게 불과 며칠 전인데. 이건 쓰레기인가 아닌가. 국에 들어간 파를 생각했다. 비리고 미끈덕거려서 숟가락으로 몰아내던 그것. 호주머니 속 파를 냉큼 버렸다. 매워서 절대 먹지 않던 파김치를 생각했다. 더러운 비닐봉지를 슬그머니 떨어뜨렸다. 산적에 왜 꼭 당근과 파를 넣어야 하나 골라내다 손등을 맞았던 기억이 났다. 불룩한 신발주머니에서 반을 덜어냈다. 흙투성이가 된 실내화가 보였다. 어쨌거나 혼이 나는 건 떼 놓은 당상. 뭐 좋은 벼슬이라고. 그래도 다 버리는 건 좀 아쉬우니, 남은 건 두어 다발. 이 정도면 대략 변명도 통하려나.
결국 혼이 나긴 했다. 이왕이면 더 뜯어올 것이지, 요것 갖고 뭘 한다고, 파김치 해 먹으면 맛있는 알배기 파인데, 가자, 거기가 어디냐. 엄마는 내 손을 거머쥐며 신발을 꿰어 신었다. 불륜현장이라도 잡으러 가는 사람처럼 눈빛이 형형했다. 이윽고 도착한 그 밭은, 멧돼지 떼라도 지나간 것처럼, 그야말로 쑥대밭. 남은 것은 찌끄레기와 밟히고 뭉개진 파뿌리들. 그나마 쓸 만한 것들을 골라 담는 엄마는 내내 아쉬워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내가 버렸던 파뭉치가 번뇌의 상징처럼 점점이 찍혀 있었다. 골라내야 할지 주워 삼켜야 할지 알 수 없었던, 내가 싫어하지만 어쩌면 어른들은 좋아할지도 모를, 쓸모와 취향 사이, 칭찬과 질타 사이에서.
그때의 내가, 봄날 파나물의 단맛과 파강회의 어여쁜 맛을 알았더라면, 막 버무린 파김치의 오독오독한 파대가리 맛을 알았더라면, 닭곰탕이나 냉모밀 위에 듬뿍 얹은 생파의 향긋함을 알았더라면, 육개장 속에 뭉근해진 파의 나긋한 맛을 알았더라면, 스페인 어느 마을에서는 직화로 구운 대파인지 칼솟인지를 어린애들처럼 턱받이를 한 채 추접스럽게 황홀하게 먹는다는 걸 알았더라면, 구운 파 속살의 그 달고 보들보들한 맛을 알았더라면. 아마도 외투를 펼쳐 보자기 삼아 가득 채운 파를, 산타클로스처럼 어깨에 짊어지고, 당당하게 집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봐라, 내가 어디 쓰잘데없는 것만 주워 오는 계집애냐 하면서. 양념의 자격이 아니라 바로 그 자체로서, 파는 좀 더 우쭐해질 필요가 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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