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양어선서 실족사한 유영호씨
유해 3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어머니 묘 옆자리에 오늘 안장
해외 사망 선원 400명 넘어
정부, 2014년부터 송환 나섰지만
290여명 유해 아직 못 돌아와
1988년 9월 부산항. 당시 26세의 청년 유영호씨가 모로코 서쪽 대서양 해상의 스페인령 섬나라인 라스팔마스로 떠나는 원양어선에 몸을 실었다. 그 해 2월 아버지를 여읜데다 2남2녀 중 장남인 그에게 원양어선은 결혼과 창업 자금을 동시에 마련해 줄 수 있는 기회로 보였다. 그러나 유씨의 꿈은 얼마 가지 못했다. 몇 달 뒤 라스팔마스 부두에서 정박해 있는 배에 식재료를 나르던 그는 갑자기 부두와 배를 연결한 다리를 덮친 파도에 그만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며칠 후 유씨는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의 시신은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가족들은 현지에서 치른 장례식 사진만 몇 장 겨우 전달 받을 수 있었다. 당시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유씨처럼 수출 역군이 되겠다며 원양어선을 탄 51만여명 가운데 이렇게 현지에서 목숨을 바친 이들은 400명도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모두 국가 경제를 위한 희생이었다. 우리나라는 1957년 6월 최초의 원양어선인 ‘지남호’를 띄우면서 원양어업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71년에는 원양수산물 수출액(5,500만달러)이 총 수출액(10억7,000만달러)의 5%를 차지할 만큼 원양어업이 효자 산업으로 부상했다. 유씨 같은 원양어선 수출 역군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해양수산부는 뒤늦게 이러한 원양어선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2014년부터 해외에 묻혀있는 원양어선원의 시신을 국내로 이장하는 사업을 펴기 시작했다. 앞서 정부는 2002년부터 라스팔마스와 테네리페, 사모아 등 원양어선들이 주로 조업했던 7개 국가에서 318명의 원양어선원 묘지를 관리해 왔다. 이렇게 지난해까지 23명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유씨의 가족도 지난 4월 정부에 유씨의 이장을 신청했다. 그리고 지난 16일 유씨의 시신은 30년만에 한국으로 옮겨졌다. 다른 4명의 유해도 함께 들어왔다.
그러나 유씨의 귀환은 너무 늦은 것이었다. 지난 3월 유씨의 어머니는 89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이역만리에서 숨진 장남을 30년간 기다리던 어머니는 결국 아들의 유골을 안아 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동생 유선우(47)씨는 26일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형 때문에 눈을 못 감으시는 걸 보고, 반드시 형을 모셔 부모님 곁에 묻어드리기로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가족들은 인터넷을 통해 우연히 정부의 유해 송환 사업을 알게 됐다. 유씨의 유해는 27일 경남 양산시에 위치한 가족묘에 묻힐 예정이다. 어머니 옆 자리다.
정부가 나섰지만 여전히 290명의 원양어선원은 머나 먼 타향에 묻혀있다. 동생 유씨는 “많은 분들이 더 늦기 전에 정부의 도움을 받아 가족을 고국으로 모실 수 있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세종=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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