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근로자 “공짜 야근문화 이젠 바뀌겠죠”
300인 이상 사업장 59%, 근로 단축 시행 중
중기 근로자 “처벌 6개월 유예에 회사는 눈치만”
생산직 근로자 “임금 깎이는데 대책 없어” 한숨
1일부터 세계 최장 수준의 근로시간을 줄여 ‘저녁 있는 삶’을 만들기 위한 주 최대 52시간 근로시대가 열렸다. 이날부터 근로자 300인 이상 공공기관과 기업 종사자들은 주당 40시간, 연장근로 12시간을 포함해 주당 근로시간이 52시간을 넘지 못한다. 1953년과 1989년 근로기준법 제ㆍ개정, 2004년 주5일제 전면 도입 이래 한참 만에 찾아 온 노동환경의 대격변에 근로자들과 기업들 모두 크게 술렁이고 있다.
과로사회에 마침표를 찍기 위한 근로시간 단축의 첫 단추가 꿰어졌지만 아쉽게도 이번 개정 근로기준법 시행은 다소 느슨한 ‘절반의 출발’에 그쳤다는 평가다. 적절한 법령 해석과 가이드라인 부재로 빚어질 수 밖에 없는 시행 초기 혼선에 더해 시행 직전에 내려진 6개월 처벌유예 결정 탓이다. 주 52시간 근로제를 맞이한 근로자들조차도 동상이몽이다. 근로시간 단축을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들뜬 표정, “달라져봐야 얼마나 달라지겠느냐”는 냉소적인 표정, “저녁은 있지만 저녁밥은 없는 삶”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의 걱정스런 표정이 교차한다. 충분히 준비를 갖춘 대기업과 달리 인력 충원 등 대비에 난항을 겪어온 중소ㆍ중견기업, 건설업ㆍ노선버스업 등 특수업계 사이 근로시간 단축을 둘러싼 명암도 뚜렷하게 엇갈릴 것으로 보인다.
여유만만 대기업… “30분의 기적 실감”
한화케미칼에 다니는 김모(38)씨는 회사의 시차 출퇴근제로 ‘30분의 기적’을 실감하고 있다고 한다. 네 살배기 딸의 아빠인 김씨는 6월부터 오전 7시부터 오전 10시까지 30분 간격으로 출근시간을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시차 출퇴근제를 활용해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한 아내 대신 아이의 어린이집 등ㆍ하원을 도맡기 시작했다. 30분의 등교시간 동안 자연스레 아이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됐고 데면데면했던 부녀 사이는 이전보다 훨씬 가까워졌다. 그는 “처음에는 고작 출퇴근 30분을 당기고 미뤄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면서 “비록 무언가를 추가로 할만한 시간은 아니지만 일로 가득 찼던 삶에 작은 여유가 생긴 기분”이라고 했다.
우선 적용 대상인 300인 이상 기업 중 대기업들은 큰 혼란 없이 변화를 받아들이는 모양새다. 법 시행 이전부터 근로시간 유연화를 위해 시차 출퇴근제를 비롯해 단축근무 등 다양한 대안을 찾은 결과 ‘문제 없다’는 입장이다. 고용부가 300인 이상 사업장 3,627곳을 전수조사한 결과 59%는 이미 관련 제도를 시행 중인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생산성 하락 우려가 컸던 대기업 공장라인도 준비를 마쳤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는 생산직을 주간 2교대 근무제로 전환해 전반조와 후반조가 각 8시간씩 근무하는 ‘8+8근무제’를 시행하고 있고, 포스코는 2개조가 하루 12시간 교대로 일하고 나머지 2개조는 이틀을 쉬는 형태의 4조2교대를 도입했다.
대기업 근로자들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화장품 제조ㆍ판매사에서 제품 디자인을 맡고 있는 이유나(26)씨는 “매일 12시간을 넘게 일했는데 이젠 저녁시간에 퇴근할 수 있어져 너무 좋다”며 “사실 주 52시간도 주 5일 기준으로 하루 10시간을 꼬박 일하는 건데, 당장은 어렵겠지만 더 줄여가는 것이 옳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 동안 포괄임금제로 공짜 야근이 당연했던 기업 문화가 개정 근로기준법 ‘눈치보기’ 덕분에 바뀔 것이란 기대도 있다. 대기업 제조업체 5년차 과장 백모(34)씨는 “대기업은 외부 시선을 의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우선 시행을 잘 할 것이라 본다”며 “매일같이 자정에 퇴근하면서도 추가수당을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올해부터는 확실히 달라진 분위기를 느낀다”고 답했다.
“근로시간 단축은 딴 세상 얘기”
“회사에서는 유연근무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감히 신청할 용자(용감한 사람)가 있을까요.”
A(28)씨가 다니는 무역회사에서 근로시간 단축은 여전히 딴 세상 얘기다. A씨의 회사는 주 52시간제 이슈에 발 맞춰 시차가 있는 다른 나라와 업무를 함께하는 특성을 반영해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정하는 유연근무제를 5월부터 운영하기 시작했으나 지금까지 아무도 신청하지 않았다. A씨는 “한국 회사에서 어떤 윗사람이 ‘오후에 출근하겠다’하면 좋아하겠냐”라며 “할 일이 없어도 다들 오전 8시30분에는 출근해 사무실에 앉아있다”고 전했다. 그는 특히 “법 시행이 사실상 6개월 유예되면서 근로시간 단축에 대한 회사 측의 태도는 더욱 미적지근해졌다”고 강조했다.
근로시간 단축 대상이지만 근로자 300인을 갓 넘긴 기업들은 주 52시간 근로제를 위한 준비가 상대적으로 충분하지 못해 ‘일단 지켜보자’고 손을 놓은 곳이 수두룩하다. 한 자동차 부품회사 관계자는 “근로시간 단축 대상이지만 내부적으로 준비를 마치지 못해 아무런 대책이 없었는데 6개월 유예 결정에 다행이라고 안도했다”고 털어놨다. 해상 직원은 별도의 선원법을 적용 받지만 육상직(사무직)은 주 52시간 대상인 해운업계 관계자 역시 “아직 일하는 시간을 줄이려는 움직임은 없다”며 “회사 차원의 방침이 없다 보니 정부가 업종 특수성을 반영한 가이드라인을 내주기만을 기다리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불필요한 야근이나 휴일근로를 막으려 정해진 시간에 업무용 컴퓨터가 자동으로 꺼지는 ‘PC오프제’를 비롯한 관련 제도들이 벌써부터 유명무실해진 사례도 적지 않다. 증권사에 다니는 정민재(32)씨는 회사가 PC오프제를 도입했으나 “일하는 장소만 바뀌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개인이 맡은 업무량이 그대로이니 괜히 회사에서 할 일을 집에서 하느라 업무 파일을 개인 노트북으로 옮기느라 번거로워졌을 뿐”이라는 것이다. 오후 6시 ‘칼퇴근’을 지시했다가 따져보니 일하는 시간이 주 52시간에 미치지 않는다며 추가 근무를 지시하는 웃지 못할 사례도 있다. 중소 정보통신(IT)업체의 개발자인 민동주(29)씨는 “인사팀에서 처음엔 근로시간을 줄여야 한다고 하더니 나중엔 하루에 3시간씩 더 일해야 주 52시간이 된다며 무조건 연장근로를 시키고 있다”고 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근로시간 단축의 취지가 현장에 제대로 뿌리내리기 어려워 보이는 이유다.
“더 일하고 싶다”는 현장 갈등도
생산직 근로자들은 당장 근로시간 단축으로 임금이 감소할 수 밖에 없다면서 여기저기서 곡소리를 내고 있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근로시간 단축이 적용되는 300인 이상 사업장에서 14만9,000명의 임금이 평균 7.9%(41만7,000원)정도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가장 갈등이 첨예한 곳이 노선버스업계다. 근로기준법상 특례업종에서 제외된 노선버스업계는 이번 달부터 주 68시간을 맞춰야 한다. 경기 고양시의 버스업체 소속 운전사 김모(62)씨는 “당장 월급이 80만원 정도 줄게 생겼는데 누가 반기겠느냐“며 “일할 사람도 없는데 더 일하고 싶다는 사람은 일하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근로시간이 줄면 공사기간과 공사비는 늘어나고 수입을 줄 수 밖에 없는 건설업계에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원도급사인 대형 건설사는 타격을 흡수할 여력이 있지만 하도급을 받아 인부를 직접 고용하는 중소형 건설사들은 7월 이전에 쉬는 날 없이 최대한 공사를 많이 해 놓는 임시방편 외에 뾰족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모양새다. 경남지역의 건설 하청업체 대표는 "건설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기라 하청업체들은 초과 근무를 감수해왔다”며 “현장인력의 대부분인 일용직들은 물 찰 때 바짝 벌고 그 돈으로 버티는데 앞으론 대책이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주52시간 근로제를 도입하지 않아도 되는 특례업종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직원이 수백에서 수천명에 이르는 종합병원들은 보건업이 근로시간 특례가 유지돼 당장 근무시간을 단축해야 하는 압박은 없지만, 9월부터 11시간 연속 휴식시간을 보장해야 해 고민이 깊다. 응급 수술 등이 일상인 과에서는 의료진뿐 아니라 의료기술직도 비상대기 상태로 근무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형종합병원 한 관계자는 “늦은 밤 심근경색 환자가 막힌 혈관을 뚫는 심장 스텐트 시술을 받아야 할 상황이 생기면, 의사나 간호사뿐 아니라 방사선사 등도 와야 시술을 할 수 있다”며 “응급시술 때문에 초과근무를 했어도 다음 날 다른 환자들과 예약된 정규 스케쥴을 미룰 순 없기 때문에 사실상 11시간 휴식을 지킬 수 없는 과들이 상당한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답답해했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정재호 기자 next88@hankookilbo.com
김지현 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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