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땅, 두 다리, 대강의 둥근 모양을 갖춘 ‘찰 것’만 있다면 어디든 경기장이 된다. 판자촌의 좁은 골목길에서도 산골 마을의 비탈길에서도 공은 찰 수 있으니까. 그래서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아프리카 빈민가 아이들도 감히 세계적인 선수가 될 꿈을 꾼다.
‘맨몸으로 둥근 공 앞에 설 때, 모두가 평등해진다는 것.’ 오늘날 축구가 세계인이 사랑하는 넘버 원 스포츠인 이유다. 게다가 마지막 1분까지 ‘누가 이길지 모른다’는 사실은 짜릿하다. FIFA 랭킹 57위의 한국이 세계 1위이자 월드컵 우승국을 꺾는 것과 같은 쫄깃한 이변이 가끔이 아니라 ‘자주’ 일어나기 때문. 그래서 64년 전 첫 월드컵 본선 경기에서 9대 0으로 패한 한국 대표팀에게 닿은 한마디는 의미심장하다. “한국이 지금은 처참하게 패했을지언정 수십 년 뒤엔 어찌 될 줄 누가 알겠는가.” 바로 월드컵을 만든 세계 축구의 아버지 쥘 리메(Jules Rimetㆍ1873~1956)의 말이다.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축구 앞엔 계급주의도, 민족주의도 없다”고 외친 그는 거리의 게임이었던 축구를 만인이 사랑하는 스포츠로 탈바꿈시킨 주역이다. 매 대회, 매 경기마다 새로운 드라마가 탄생하는 세계인의 축제 월드컵의 기원은 쥘 리메가 태어난 150년 전 프랑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두가 평등한 ‘공차기’를 꿈꾼 소년
아버지는 가난한 식료품상이었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동쪽 변두리 도시에서 태어난 쥘 리메에게 스포츠는 신기루였다. 생업에 얽매이지 않은 귀족들이나 누리는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충분한 여가를 가진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종의 놀이 문화였던 셈이다. 백작의 아들이었던 쿠베르탱이 내세운 올림픽의 정신 ‘아마추어리즘’도 사실은 이런 시대적 맥락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단 한 번도 그라운드를 직접 뛰어 본 적 없던 리메에게 스포츠를 향한 열망이 움트기 시작했다.
가난한 고학생이었던 소년은 변호사가 되어 지식인 청년으로 거듭난다. 자리를 잡자마자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스포츠 클럽을 만드는 것. ‘레드스타(Red Star)’라는 이름의 이 클럽은 그간 억눌려 왔던 그의 열망을 발산할 공간이었다. 신분을 막론하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받아들인 것도 파격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파격은 축구를 클럽 종목으로 포함시킨 것이었다. “축구는 길거리를 떠도는 영국인들이나, 근본 없는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스포츠가 아니던가.” 품위와 예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프랑스인들에게 몸을 거칠게 부딪히는 축구는 천대받던 종목이었던 것. 그러나 쥘 리메는 달랐다. 공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축구야말로 모든 계층이 참여할 수 있는 평등의 상징이라고 여겼다. 급기야는 쿠베르탱을 두고 “아마추어리즘을 운운하다니, 계급주의를 비호하는 속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날 선 비판을 쏟아내기도 한다. 스포츠를 상류층의 오락이 아닌 만인의 오락으로 해방시키고자 한 그에게 축구는 최적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모든 계급에서 향유되는 축구야말로 19세기를 교란시킨 국수주의와 극단적 민족주의를 약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통로가 될 수 있다.” 프로 선수들이 참여하는 국제 축구대회를 만들고자 한 그의 야망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굳어졌다. 1914년 암묵적 휴전이었던 ‘크리스마스 정전’ 당시 서부 전선의 한 무인도에서 만난 영국군과 독일군은 공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맨 몸으로 만났다. 상대 군영에서 들려오는 캐럴 소리에 잠시 전투를 멈추고 한바탕 축구를 했다는 일화. 쥘 리메는 축구는 전쟁 속에서도 계속되는, 세계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1921년 그가 국제축구연맹(이하 FIFA)의 3대 회장으로 나서게 된 결정적 이유다. 전장에서 유능한 선수들을 잃은 회원국들이 우르르 탈퇴해 버렸지만, 축구로 세계를 통합하고자 한 쥘 리메의 야망은 시대의 불행보다 강했다. 그 후 33년간 최장수 FIFA 회장으로 재임하며 그는 축구의 탄탄대로를 닦아냈다.
‘이 대회는 곧 유엔을 대신하게 될 것이다’
쥘 리메가 FIFA의 회장으로 부임하기 전만 해도 국제 축구대회를 만들자는 목소리는 소수였다. 아마추어 축구선수들이 올림픽에 출전하면 그뿐. “각국의 프로 리그들이 기량을 겨루는 명망 있는 국제대회를 만들어야겠다.” 쥘 리메는 오늘날 월드컵이 된 국제 축구대회의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독립 100주년을 맞은 우루과이가 대회 개최를 자청했다. 우루과이는 모든 참가국의 교통ㆍ숙박비를 전액 제공하겠다며 의욕을 보였으나, 중남미 한가운데 위치한 낯선 나라는 유럽에서 너무나 멀었다. 배로만 보름이 넘게 걸리는 이유를 들어, 유럽의 강호들은 줄줄이 불참 의사를 밝혔다. 10년간 공들인 꿈이 눈 앞에서 좌초될지 모를 이때, 쥘 리메는 읍소를 위한 긴 여정을 떠난다.
“우리가 축구 종주국인데 왜 다른 나라와 축구 실력을 겨뤄야 하나” 축구 종가 영국의 자긍심은 대단했다. ‘긴 항해 중에 컨디션 관리를 어떻게 하냐’는 딴지부터 ‘우리보다 못하는 나라와 실력을 겨룰 필요가 있냐’는 비아냥까지. 영국은 처음부터 넘어올 상대가 아니었다. 사비까지 털어 먼 길을 왔건만 영국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거듭된 읍소가 변방에서 울림을 만들어낸 것일까. 그가 유럽 대륙을 분주하게 누빈 결과, 프랑스를 비롯한 벨기에ㆍ루마니아ㆍ구 유고슬라비아까지 4개국 선수들이 우루과이행 여객선에 몸을 싣기로 결정한다.
우승컵 트로피를 품에 안고 선수들과 함께 배에 오른 쥘 리메는 언젠가 월드컵이 유엔의 역할을 대신하게 될 날을 상상한다. “축구는 각 나라가 경쟁하지만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처럼 차이를 초월해 다른 집단과 교감하기 위한 최적의 수단이 있을까.” 실제로 오늘날 FIFA 가입국은 유엔 회원국보다 많다고 하니, 그의 꿈은 제대로 이뤄진 셈이다. 하지만 당시 유럽의 언론들은 전 세계인이 함께하는 축구 대회의 탄생을 기뻐하기는커녕, 시종일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그 의미를 깎아내렸다. 90여 년이 지난 지금, 세계인의 축제로 자리잡은 월드컵을 본다면 뭐라 할 말이 없겠지만.
9대 0으로 지는 나라, 월드컵 퇴출? 아니다
“지금은 한국이 처참하게 무너졌다고 해도, 수십 년 후엔 어찌 될지 전혀 모르는 일이다. 월드컵은 누구나 출전할 수 있기 때문에 월드컵이다. 그것이 월드컵이란 이름에 담긴 정신이다.”
한국 축구계와 쥘 리메 사이의 오랜 일화는 최근 들어 부쩍 회자된다. 1954년 당시 스위스 월드컵에 처음으로 출전한 한국 대표팀은 헝가리에 9대 0으로 대패하면서 날 선 비방에 직면했다. “아시아나 아프리카 나라들은 실력이 떨어져도 한참 떨어진다. 이런 수준 안 되는 나라들이 월드컵에 나와 격을 떨어뜨려서 되겠느냐”는 힐난이었다. ‘한국의 미래를 함부로 예단치 말라’는 쥘 리메의 엄중한 예언대로 한국은 2002년 4강에 진출하는 신화를, 아시아에서 최초로 9회 연속 본선에 진출하는 안정적인 기록을, 2018년 세계 1위 독일을 꺾는 이변을 이뤄냈다. “강한 팀이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팀이 강한 팀이다”라는 독일의 전설적인 감독 프란츠 베켄바워의 명언도 얄궂은 현실이 된 셈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모든 팀에게 주어지는 ‘가능성’이야말로 쥘 리메가 가장 사랑한 축구의 매력이 아니었을까.
“그는 휴머니스트이자 이상주의자였습니다. 오직 축구를 통해 사람들은 서로를 신뢰하며 마주 할 수 있다고 믿었죠. 증오나 혐오까지도 뛰어 넘은 ‘진짜 화합’이 가능하다고요.” (쥘 리메의 손자 Yves Rimet)
쥘 리메가 취임할 당시 12개 회원국으로 출발한 FIFA는 오늘날 200여 개 회원국, 3억 명의 축구 선수들이 떠받치는 거대 권력이 됐다. 화합의 이상을 추구했던 그가 상업주의, 승부조작, 온갖 비리와 부패로 얼룩진 오늘날의 FIFA를 본다면, 어쩌면 실망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가 지키고자 했던 축구인의 정신만큼은 4년마다 우리를 일깨운다. 그라운드에 떨어진 땀의 가치는 모두 같다는 것, 전 세계인 누구나 그 땀의 과실을 즐길 자격이 있다는 것. 이제 피날레를 향해 가는 2018년 러시아의 여름이 88년 전 우루과이만큼이나 뜨거운 이유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