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본 줄거리 나오면
제작국이 가장 먼저 찾는 사람
등장인물 생활공간 디자인
캐릭터 성격 묻어나야 성공
#2
‘위대한 유혹자’는 힘들었던 작품
부유층 정서 이해하기 어려워
PD-미술감독-소도구팀 협업 필수
MBC 월화드라마 ‘검법남녀’에는 ‘괴짜’ 캐릭터가 등장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10년 차 법의관 백범(정재영)은 법의학적 지식을 두루 갖춘 천재지만, 사회성이 떨어지는 데다가 배려심도 없고 고집도 세다. 집에는 들어가는 법이 없고 너저분한 국과수 사무실에서 숙식하며 일에만 빠져있다. 여기서 잠깐, 그의 사무실을 떠올려보자. 책상은 말할 것도 없고, 벽을 타고 빽빽하게 올라온 온갖 서류 뭉치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얼룩덜룩한 서류와 먹다 남은 음식쓰레기들이 널려있는 공간. 실제로 배우 정재영이 살 것만 같은 이 사무실, 과연 누가 디자인해서 꾸며놨을까.
정답은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다. MBC아트 미술제작국 미술1부 과장이자,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 김민정(40)씨의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있다. 전담 영역은 있었지만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라는 호칭이 생긴 지는 얼마 안됐다. 그 전에는 그저 소품팀 직원이거나 전문성을 그나마 인정 받아 소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불렸다. 드라마 세트의 중요성이 커지고 이를 총괄할 스태프의 전문성을 인정 받으면서 직함도 달라졌다.
요즘 방송사 드라마 제작국은 시놉시스가 나오면 가장 먼저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를 찾는다. 등장인물이 사용하는 공간을 미리 설계하고 디자인하는 기획 단계를 밟는다.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는 공간에 컨셉트를 잡아 벽지 색감이나 가구 선별 및 배치, 조명 등을 토대로 시안을 만들어 PD, 미술감독과 협의를 거친다. 최근엔 사실성을 더하기 위해 공간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의 성격, 성향 등을 파악해 세트를 짓는 일이 많아졌다. 단순한 소품 진열에도 전문성을 갖춘 인력이 요구되는 셈이다.
김씨는 이 모든 과정을 “공간과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시안을 만드는 작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뒤탈이 없다. 그래서 드라마 촬영 전 세트가 완성될 때까지의 준비기간이 두 달 반 정도나 소요된다. ‘검법남녀’가 심혈을 기울인 국과수의 부검실과 백범의 사무실 등도 이런 과정을 거쳐 완성됐다.
닷새 걸려 완성한 백범 사무실의 비밀은
‘괴짜’ 법의관 백범을 그리는 일은 김씨의 최대 고민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사무실은 특별해야 했다. ‘검법남녀’의 노도철 PD에게 “국과수 자료를 많이 보는 캐릭터니 사무실에 서류가 꽉 들어찼으면 좋겠다”는 요구사항을 들었다. “굉장히 지저분하고 어수선한 인물이지만 국과수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인지를 보여줘야 했다”.
일단 현실감을 강조했다. 잔뜩 모아온 서류들도 ‘재가공’ 했다. 오래된 느낌을 살리기 위해 커피를 타서 분무기에 넣고 뿌렸다. 종이가 누렇게 변해 낡은 효과를 준다. 서류 사이사이에도 포스트잇을 붙여 백범의 빈틈없는 성격을 드러냈다. 일일이 글씨를 써 넣기도 했다. 사무실에서 숙식하는 백범의 생활패턴도 신경 써야 했다. 김씨는 늦은 작업으로 허기를 채우다 남은 라면과 귤 껍질을 일부러 세팅했다. 소품으로 활용하는 기지를 발휘한 것. “의외로 촬영현장에서는 반응이 좋았다”고. 꼼꼼한 수작업이 많이 들어가다 보니 최소 이틀이면 마무리되는 작업이 닷새나 걸렸다. “‘검법남녀’에서 가장 힘을 들인 공간”이라고 할 만하다.
MBC 드라마 ‘위대한 유혹자’ 역시 김씨를 괴롭혔던 작품 중의 하나였다. 상위 1% 부유층 자녀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주인공들이 모이는 아지트에는 각 개인의 특성이 담겨야 했다. 그들의 정서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것을 공간에 풀어내는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 더군다나 부유층의 일상을 드러내야 하는 고가의 가구나 제품들이 많아 파손이나 분실의 위험도 도사렸다. 마음이 쓰이는 물품은 보험을 들어둬야 했다. 이 고가 제품들 때문에 그는 촬영 현장을 떠날 수가 없었다. 심혈을 기울였지만 ‘위대한 유혹자’는 2~3%대의 저조한 시청률을 남겨 김씨에게는 아픈 손가락이 됐다.
올해로 13년째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로 일하고 있는 김씨에게도 어려운 분야가 있다. 바로 사극이다. 지난 5월 종방한 종합편성채널(종편) TV조선 ‘대군’에 등장한 편전 등의 인테리어도 김씨의 작품이다. 가구 이외에는 공수할 수 있는 물건이 적기 때문에 대부분 제작하는 경우가 많다. ‘대군’에서 사용된 한지로 만든 등도 직접 제작했다. 나무틀 디자인부터 그 속의 전통문양까지 고안해 완성했다. 사극을 경험한 직원이 없어 김씨 혼자 담당할 때가 많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거의 없고, 아이디어를 더해 전부 제작을 해야 하기 때문에 사극을 두려워하는 분들이 많다”.
숨은 드라마 분석가, 소통의 달인이 되기까지
“저희는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해요.” 그가 가만히 지난해 방송한 MBC드라마 ‘병원선’의 시안을 내밀었다. 배 안에 의료시설을 갖추고 섬마을에서 의료활동을 하는 의사들이 주인공인 드라마였다. 표지를 넘기니 주인공 송은재(하지원)와 곽현(강민혁)의 캐릭터 설명과 함께 ‘병원선->치유의 공간, 성장의 공간, 소통과 진심의 공간’이라고 써있다. 은재는 “엄마의 죽음으로부터 현실도피하고 외과의사로서 자존심 회복을, 현은 의료사고로 인한 현실도피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 그리고 꿈이 내재돼” 있는 캐릭터로 설명됐다. 그래서 병원선은 환자들의 치료 공간뿐만 아니라 이들 의사들의 ‘힐링’ 장소로도 그려져야 했다.
캐릭터 분석은 필수란 얘기다. 그는 “캐릭터를 한 눈에 보여주기 위한 포인트 소품까지 제시”하는 게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의 업무라고 했다. 예를 들어, 여행을 좋아하는 남자 주인공이 있으면 ‘사진촬영을 좋아하는 인물로 그리면 어떨까’라는 취미 설정을 제안하기도 한다. 연출팀에서 승인이 떨어지면 주인공의 방에 그야말로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 이어진다. “누가 봐도 이 방의 주인이 어떤 직업을 갖고 있고, 연령대가 어떨지 보여줄 수” 있게 된다. 연출팀에서는 이렇게 컨셉트를 잡아주는 걸 무척 반긴다. 신경 쓰지 못한 부분까지 확인해서 특화된 인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이래서 소통이 중요하다. 김씨는 의상팀과도 자주 대화를 나눈다. 배우가 입은 옷이 전체 세트의 색감과 어울리지 않을 때가 있어서다. 의상팀과 세트의 컨셉트, 인물 캐릭터 등 정보를 교환하는 건 필수다. 배우들이 주로 어떤 톤의 의상을 입는지도 파악해 놓아야 하는 이유다.
소통의 기술이 더 좋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는 외부협찬 업무까지 도맡아 한다. 드라마에 사용하는 소품을 모두 구매할 수 없으니 협찬을 받는 일이 다반사다. 예전에는 협찬 부서가 따로 있었다. 그러나 기획하는 사람과 협찬 받는 사람이 다르니 의도했던 제품이 올 리가 만무했다. 아예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가 나서는 계기가 된 셈이다. 담당 PD나 미술감독들로서는 “좋은 시스템이 정착됐다”고는 하지만, 김씨 입장에선 “주객이 전도된 느낌도” 든다. 드라마 촬영 전 기획 과정이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요새는 협찬업무가 많아 시간 활용에 애를 먹는다. 그래도 드라마 전반적인 업무를 꿰뚫어 의견을 조율하고 최선책을 찾아가는 일에서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김태호 PD의 고마웠던 한마디
능동적으로 일 처리를 하니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인정도 받고 있다. 김씨는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이 시즌을 마감하기 직전에 협업을 했다. 유재석 박명수 등 멤버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을 카페처럼 꾸며 안락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당시 ‘무한도전’ 제작진에서 “예능에도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가 필요하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무한도전’의 김태호 PD가 소품 등을 선별하는 눈이 까다로워 조연출들이 직접 물건을 찾아 구매하는 일이 많았는데, 김씨가 구세주였던 셈이다. 김 PD도 녹화 세트 인테리어에 크게 흡족해했다고.
“김 PD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대요. 앞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하게 되든지 간에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를 찾겠다고요. 말만으로도 너무 감사했어요. 하지만 이내 슬퍼지더라고요. 팀에 사람이 부족하니 예능까지 맡을 여력이 없거든요. 일이 들어와도 일할 사람이 없는 거죠.”
김씨는 5명의 팀원들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 턱없이 부족한 인원이다. 드라마 한 편이 3개월은 차지하니, 두 세 작품만 해도 인력이 달린다. 한 사람이 여러 일을 걸쳐서 해야 하는 구조라, 일의 집중도나 완성도 면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더 많은 후배들이 절실하다.
“제가 할 역할이 하나 더 늘었어요. 이번 인터뷰를 통해 방송에도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가 있다는 걸 널리 알리고 싶어요(웃음).”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스태프의 물건] 줄자는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의 필수품!
“가장 중요한 물건이요? 당연히 줄자죠.”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의 가방 안에는 어떤 물건들이 가득 차 있을까. 온갖 자료를 저장하고, 검색하며, 전달할 수 있는 노트북은 김민정씨와 거의 한 몸이다. 사무실과 촬영 현장을 바쁘게 뛰어다니는 그에게 줄자와 미니드릴, 컬러바이블 책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다. 연출팀과 미술감독, 소도구팀 등과의 소통을 위해서는 그때그때 메모할 수 있는 다이어리도 빼 놓을 수 없다. 그러니 가방이 한 보따리가 된다.
과연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은 무엇일까. 김씨는 망설임 없이 “줄자”라고 했다. 집을 짓고 방이나 사무실 등을 꾸미는 일에 줄자가 없다면 곤란해진다. 이유는 설계도면과 실측이 다른 경우가 빈번해서다.
김씨는 “인테리어라는 게 내부에 무언가를 채우는 일을 하기 때문에 공간의 실측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세트가 설계도면대로 지어졌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사람 사는 집이 아니라 도면과 실측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 한 번은 설계도면과 실측이 달라 고생한 적이 있다. “부엌에 냉장고 장을 만들어놨는데 글쎄 촬영을 앞두고 냉장고가 그 장으로 안 들어가 당황한 적이 있어요. 이런 일이 자주 생기면 안 되잖아요. 줄자로 정확하게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죠.”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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