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 붕괴(1989년 11월) 이후 ‘냉전 체제의 종언을 고한 도시’로 기억되던 독일 수도 베를린은 이제 ‘유럽 신생혁신기업(스타트업)의 천국’으로 통한다.
9일 스타트업과 투자자를 연결해주는 온라인플랫폼 ‘엔젤리스트’에 따르면 베를린의 스타트업 개수는 2,992개로, 독일 전체(6,571개)의 45%를 차지한다. 베를린은 지난해 한 글로벌 자산정보업체가 꼽은 ‘창업하기 좋은 도시’에서 실리콘밸리가 위치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이어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베를린의 창업 열기는 막대한 투자금으로도 확인된다. 올해 독일 스타트업은 지난해보다 88% 증가한 43억 유로(5조6,000억원)을 유치했는데 이 중 70%가 베를린에 쏠렸다.
베를린에 스타트업이 몰리는 가장 큰 이유는 저렴한 물가다. 도시ㆍ국가 비교 통계사이트 넘베오에 따르면 베를린의 생계비지수(Cost of Living Index)는 68.58(미국 뉴욕물가 100이 기준)로 전세계 535개 도시 가운데 180위다. 생계비지수는 식료품을 포함한 생계비 구성 상품 및 서비스의 가격 변동을 수치화한 물가지수다. 지수값이 82.08인 서울(34위)은 물론이고 영국 런던(35위), 프랑스 파리(25위), 미국 샌프란시스코(14위) 등 다른 주요 도시에 비해 베를린의 물가는 크게 낮은 편이다. 과거 분단으로 개발이 더뎠던 탓에 다른 서유럽 국가와 비교해 임대료도 낮다.
저렴한 물가 덕에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인재들이 모이면서 베를린에는 자연스럽게 스타트업 커뮤니티가 형성됐다. 베를린 시내에는 매일 같이 스타트업 운영자들의 세미나와 밋업(오프라인 모임)이 열린다. 베를린에 회사를 차린 창업가 중 독일 아닌 외국 국적자가 43%에 달한 만큼 외국인과 이민자에 우호적인 분위기도 창업 열기를 북돋고 있다. 더구나 ‘스타트업 허브’로 불리는 경쟁지 런던이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로 주춤하면서 베를린은 독보적인 스타트업 요람으로 자리매김했다. 코르넬리아 이처 베를린시정부 경제장관은 브렉시트가 현실화된 2016년 당시 “베를린은 브렉시트가 제공한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이라고 반색하기도 했다.
사회 저변의 반(反)정부 정서와 개인정보 보호에 민감한 문화도 블록체인 관련 스타트업들을 끌어오는 데 한몫했다는 평이다.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만난 스벤 로스바흐 사토시페이 최고리스크책임자(CRO)는 “베를린에는 안티 은행, 안티 정부 등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굉장히 깊게 박혀있는데, 이러한 생각이 블록체인 스타트업이 성장하는 배경이 됐다”고 말했다. 플로리안 글라츠 독일 블록체인연방협회장도 “분단 시절 악명 높은 동독 국가안보부(슈타지)를 경험했던 탓에 베를린에는 개인정보를 중시하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다”고 말했다. 탈중앙화되고 익명성이 보장되는 블록체인의 특성이 베를린 사회의 분위기와 맞아 떨어진다는 의미다. 베를린=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2018 KPF 디플로마-블록체인 과정에 참여 후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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