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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의 심야식탁] 도토리가 불러온 황금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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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의 심야식탁] 도토리가 불러온 황금시대

입력
2018.07.11 04:4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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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달리, 황금시대. 1957년.
살바도르 달리, 황금시대. 1957년.

친척을 방문하러 미국에 갔다 돌아온 엄마 친구가 도토리가루와 고사리 한 다발을 선물로 내놓았다. 냉동건조커피나 통조림햄 같은 것들을 싸 짊어지고 와 나눠주던 시절이 있기도 했었다지만, 클릭 한번으로 세계 각국 그 무엇이든 집까지 배달되는 요즘 세상에, 미국산 도토리가루며 고사리가 웬말인가. 통통한 고사리가 지천이더래, 도토리는 길바닥에 썩어 문드러지고, 그걸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래, 어쩌겠어 감사하다 받아와야지, 노인네들 머릿속에는 여전히 떠날 때 그 궁핍했던 나라로 남아 있지 않니, 많이도 모아놨더라, 그냥 맛이나 한번 보라고.

엄마 친구의 시댁 어르신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 고사리와 도토리. 그걸 주워 빻고 우리고 말려서 만든 도토리가루로 묵을 쑤던 엄마는, 아주 오래 전 엄마의 할머니가 쑤어주던 묵 맛을 기억해냈다. 솜씨가 좋은 양반이었어. 없던 시절에 대강 배만 채우면 될 걸 뭘 그렇게 애를 쓰고 정성을 들여 예쁘게 만드는지. 속껍질을 하나하나 다 벗겨내고 몇 번이고 물을 갈아 떫은 기를 빼고, 지푸라기로 만든 수세미로 오래 문질러서 아주 고운 가루를 만드셨어, 그래서 그렇게 야들야들 찰진 묵이 나온 걸까? 어디서도 못 먹어봤다, 그렇게 맛있는 묵은, 기포가 이렇게 중대가리처럼 동글동글 풀떡풀떡 올라오면 다 된 거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 양반 얼굴이 왜 이리 생생하다니.

홍차에 적신 마들렌처럼, 아득한 시간의 저편으로 인도한 도토리가루. 관능적인 모양이나 향긋한 냄새를 가진 것도 아닌데, 그저 동글동글한 작은 열매일 뿐인데. 도토리가 불러일으킨 먼 옛날의 추억은 얼마나 풍요로운가. 맛이나 냄새를 뿜어내지 않아도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작동이 되는, 보다 더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힘 같은 게 응축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돈키호테를 황금시대의 상념으로 이끈 것도 바로 그 도토리였다. 양파 한 개와 굳은 빵으로 겨우 허기를 달래오던 돈키호테와 산초. 마침 목동들의 오두막에서 밤을 맞게 되는데, 비록 땅바닥에 양가죽 몇 장을 깔아 만든 조촐한 식탁이지만, 진심 어린 호의로 차려낸 저녁식사에 초대된다. 염장 염소고기를 끓여 만든 스튜를 나눠 먹고, 딱딱한 치즈 반 덩어리와 구운 도토리를 안주 삼아, 뿔로 만든 잔에 술을 나눠 마시며 익어가는 밤. 산초가 코르크나무에 매달아놓은 술통에 왔다갔다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돈키호테는 도토리 한 주먹을 집어 들어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도토리가 불러일으킨 황금시대의 추억. 옛사람들이 행복한 세기라 불렀던 바로 그 황금시대. 돈키호테는 도토리를 손에 들고 일장연설을 늘어놓는다.

황금시대란 무엇이냐. 벌들의 달콤한 노동으로 이루어낸 꿀과 우람한 나무들이 떨구어준 달콤한 열매를, 인간이 수고할 필요도 없이 취할 수 있던 시대. 네 것 내 것 구분 없이 모두가 화평하게 나누는 성스러운 사회. 속임수나 사악한 행동도 없고 재판할 일도 재판 받을 일도 없는 정의로운 시대. 처자들과 부인들이 희롱이나 음탕한 시도로 순결이 더럽혀질 염려 없이 어디든 나다닐 수 있던 시대. 하지만 그런 황금시대는 가고 여자들은 위험하고 악습이 늘어난 시대에 들어 있으니, 그것을 막기 위해 편력기사가 생겨났다는 것. 처자들을 지키고 미망인들을 보호하며 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하야. 돈키호테는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 나선 편력기사라는 것.

돈키호테의 말을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산양치기들은 노래 잘하는 목동을 떡갈나무 그루터기에 불러 앉혀, 화답하듯 사랑노래를 들려주게 하는데. 삼현금을 뜯으며, 나는 알아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올랄라,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도, 띵가띵가. 모두가 저마다의 황금시대를 떠올리는 바로 그 자리가 황금시대. 도토리가 소환한 황금의 시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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