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아트 핸들러’ 김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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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 포장-운반부터
액자교체-간단한 복원까지 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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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빨래터’ 이중섭 ‘소’ 등
손끝에서 미술시장 왔다갔다
최근 한국 미술계에 경사가 있었다. 5월 27일 열린 서울옥션 제25회 홍콩세일에서 김환기의 붉은 전면점화 ‘3-II-72 #220’가 약 85억3,000만원(6,200만 홍콩달러)에 낙찰돼 기존 김환기 ‘고요 5-IV-73 #310'가 세웠던 최고가 기록(65억5,000만원)을 경신한 것. 작품 가격에 낙찰 수수료(약 15억원)까지 합치는 서구의 셈법을 따르면 한국 미술품 ‘100억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시작가(약 77억원)부터 기존 최고가를 훌쩍 넘긴 이 작품은 외부인은 물론이고 서울옥션 직원들 중 누구도 만질 수 없었다. 단 작품을 운반하는 작품 관리팀만은 예외였다. 팀을 총괄하는 김경순 팀장은 그림을 원 주인에게서 위탁 받는 현장부터 새 주인에게 팔려 다른 곳에 둥지를 틀기까지, 여정의 시작과 끝을 함께 했다. 말 그대로 건물 한 채 값이 그의 손에서 왔다갔다 했다.
그림의 처음과 끝을 함께 하다
김 팀장의 직업을 이르는 이름은 ‘아트 핸들러’다. 소더비나 크리스티 등 외국 경매사에서 부르는 명칭이 그대로 국내에 도입됐다. 2003년 서울옥션에 입사한 그는 지금까지 15년 간 한국 미술품 최고가가 경신되는 현장을 몇 번이고 지켰다. 김 팀장은 자신의 역할을 “경매의 시작과 끝을 맡는 일”이라고 소개했다. “경매에서 사람들이 보는 작품은 최종적으로 추려진 작품들이에요. 제가 옮기는 작품은 그 수십 배 정도 됩니다. 그림이 이동하는 모든 과정에서 저와 저희 팀은 말 그대로 그림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녀요.”
한 점의 그림이 경매에 나가 낙찰되기까지의 과정은 간단치 않다. 일단 위탁자로부터 작품을 가져와야 한다. 부드러운 유산지나 면으로 그림을 싸고 그 위에 통풍이 잘 되는 골판지로 다시 포장을 한 뒤 나무 상자 안에 넣어 충격을 방지한다. 조심스레 운반된 작품은 경매에 앞서 열리는 프리뷰 전시에 나가기 전 감정과 촬영 과정을 거친다. 여기서 간단한 복원 작업이나 액자를 교체하는 일도 그의 몫이다.
가져온 모든 작품이 경매에 부쳐지는 것은 아니다. 원 주인이 1억원에 팔겠다고 했는데 감정가가 5,000만원 밖에 안 나올 경우 그림을 원래 있던 곳에 도로 데려다 놔야 한다. 조건이 맞아 전시에 나갈 경우 그림을 어떻게 걸지, 위치, 각도, 조도 등에 대해 전시기획팀과 협의한다. 경매날은 하이라이트다. 수십~수백 명이 몰린 자리에서 김 팀장의 눈은 온통 그림에 꽂혀 있다. 누군가 이동하면서 실수로 작품을 쳐서 떨어뜨리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하다. 그림의 안전은 온전히 그의 책임이다.
작품이 팔린 뒤에도 일은 끝나지 않는다. 소중히 포장해 새 주인의 집으로 옮겨야 한다. 그림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고객이 집에 있는 다른 그림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건 흔한 일이다. “캔버스가 우는데 왜 그러는 거예요?” “그림이 갈라졌는데 메워야 할까요?” 이때 간단한 컨설팅을 해주는 것도 그의 일이다. 지하실에서 곰팡이가 핀 작품은 빨리 위로 올려 음지에서 말리도록 하고, 그림 배치와 관리 방법에 대해 조언도 한다. 이 과정은 또 다시 다음 경매에 나갈 작품을 가져오는 일과 맞물린다.
“미술품은 온도와 습도에 굉장히 예민해요. 캔버스는 늘어나고 줄어드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계절이 바뀔 때마다 체크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수시로 살펴야 합니다. 간혹 고객의 집에 가보면 작품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곰팡이가 피거나 녹이 슨 경우가 많아요. 그럴 때가 가장 속상하죠. 가격이 어떻든, 저희 회사에서 팔리든 안 팔리든, 제 손으로 옮기는 작품은 가장 돋보이고 예뻐야 한다는 게 제 원칙입니다.”
“지금 여기 있는 게 별 일 없었다는 증거”
김 팀장이 아트 핸들러라는 직업을 택한 건 그림이 좋아서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3년 여간 디자이너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 지인으로부터 우연히 미술 경매사라는 곳이 있다는 걸 듣고 입사한 것이 2003년. 그는 스스로 “그림 실력이 없어서”라고 말한다. “어릴 때부터 미술을 정말 좋아했어요. 그런데 저는 그림을 못 그리거든요. 그렇다면 그림과 관련된 다른 일을 찾아보자 싶었죠. 창작자가 아닌 다른 직종으로라도 그림 곁에 머무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입사했을 당시 서울옥션 직원수를 다 합쳐도 스무 명이 안 될 때다. “(경매 때) 전체 매출 20억원이 넘으면 회사 전체 회식을 했어요. 지금은 한 작품이 100억원에 거래되니 의도치 않게 한국 미술 시장의 성장을 지켜본 셈이네요.”
15년 동안 그가 옮긴 작품은 셀 수 없다. 일주일에 많으면 1,000여 점의 작품이 오가기도 한다. 그 중엔 박수근의 ‘빨래터’부터 이중섭의 ‘소’까지, 한국 미술사에 중요하게 기록된 작품들도 다수 끼어 있다. 이번에 기록을 경신한 김환기 작품을 옮길 땐 작품관리팀 9명이 총출동했다. 외부 운송업체에서도 왔지만 작품을 직접 만지는 일의 90%는 내부에서 했다. “서로 무서운 거죠. 만지기가 두려운 거예요. 일단 작품의 크기가 크고 가격도 보통 가격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최종 책임은 저희 팀에 있기 때문에 내부에서 중요한 작업들은 다 처리를 합니다. 체력적으로도 소모가 심하지만 정신적으로도 긴장감이 굉장히 큰 일이에요.”
그 많은 고가의 작품들을 옮기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사고도 없었을까. 놀랍게도 “별 일 없었다”고 한다. 그는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게 별다른 사고가 없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수십억 원에 달하는 작품들인데 운반 과정에서 그림에 생채기라도 난다면 책임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없겠죠. 만약 그림에 무슨 일이 났다면 회사가 조치를 취하기 전에 제가 먼저 그만뒀을 것 같아요. 자존심이 허락을 안 할 것 같습니다.”
“작가적 소질이 없어” 택한 직업이라고는 하지만 작품에 대한 자부심은 누구 못지 않다. 김 팀장은 경매 전체를 “하나의 큰 시상식으로 본다”고 했다. “아트 핸들러의 역할은 단순 운반ㆍ운송이 아니라 그림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서게 만들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좋은 가격에 팔려 좋은 주인의 품으로 들어가면 그게 제일 큰 보람이죠. 새로운 곳에서 가장 예쁜 모습으로 설치되는 걸 확인하는 것까지요.”
그가 말하는 그림의 “예쁜 모습”은 무조건 새 것 같은 상태가 아니다. 낡고 닳은 그림을 어떻게 할지 묻는 고객들에게 김 팀장은 자주 “그대로 두라”고 말한다. “그림도 나이를 먹습니다. 갈라지는 건 사람에게 주름이 생기듯이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심각하게 파손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 진행되지 않게 관리에 집중하시라고 조언합니다. 심지어 액자가 파손된 경우에도 교체를 만류하는 경우가 있어요. 어떤 액자들은 그림의 일부거든요.”
아트 핸들러는 현재 국내에 100명이 채 안 된다. 미술품을 전문으로 운송, 보관, 관리하는 직종이 늘고 있는 추세지만 미술 산업 규모가 작다 보니 전문화ㆍ세분화에 있어선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림의 그림자’, 아트 핸들러를 꿈꾸는 이들이 갖춰야 할 자격 요건은 뭘까. 김 팀장이 꼽는 건 단연 그림에 대한 애정이다. 그는 “그림을 내 애인, 내 자식처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이 일을 하지 않는 게 낫다”고 솔직하게 밝혔다.
“책임만 큰 게 아니라 이것저것 아는 게 많아야 해요. 예를 들어 백남준 작품을 옮긴다고 하면 전기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은 있어야 합니다. 미술에 기본 조예가 있으면 더 좋겠죠.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그림에 대한 애착이에요.” 그는 그림을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에게 그림은 작품이고 누군가에겐 재산이며 국가적으로는 유산”이라고 했다. “일하면서 허리가 삐끗하거나 발목을 다치는 일도 많지만, 그래도 제일 속상할 땐 그림이 상해 있는 걸 볼 때예요. 그림에 애정만 있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이 일을 시작해도 좋습니다. 애정이 있으면 배우게 돼 있거든요.”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사실은 똑같아요. 빨간색 목장갑이나 흰색 목장갑이나.” 아트 핸들러 김경순 서울옥션 작품관리팀 팀장이 손바닥에 하얀 고무 처리가 된 목장갑을 내려 놓으며 웃었다. 그의 주머니에는 늘 3가지 물건이 들어 있다. 그림을 벽에 걸 때 수평을 맞추는 수평계, 작품의 상태를 체크할 때 쓰는 손전등, 그리고 이 하얀 목장갑이다.
목장갑은 주로 그림이나 조각을 만질 때 낀다. 도자기나 낱장으로 된 종이를 만질 때는 목장갑 대신 라텍스 장갑을 껴야 한다. 손의 감각이 둔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옛날엔 도자기를 만질 때 손으로 직접 만져야 했어요. 장갑을 끼면 미세한 힘 조절이 잘 안 될 수도 있거든요. 요즘엔 맨 손과 가장 흡사한 감각을 느낄 수 있는 라텍스 장갑이 나와서 이걸 씁니다.”
대부분의 라텍스 장갑은 작품 한두 점을 만진 뒤엔 버린다. 땀으로 범벅이 되기 때문이다. “통풍이 안 되는 재질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림을 만질 때의 긴장감이 있어요. 작품의 무게 때문에 땀이 나는 것도 있고요. 아트 핸들러의 노동 강도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도구라 하겠네요.”
도자기 등의 작품 외에 일반적인 경우엔 목장갑을 쓴다. 하얀 목장갑이라고 해서 특별할 건 없다. 차이점이 있다면 조금 색다르고 그래서 좀더 예쁘다는 것. 미술을 다루는 직업이다 보니 시각적인 것에 예민해 일부러 흰 목장갑을 따로 주문해서 쓴다고 한다. “빨간 목장갑은 주로 건축자재를 나르는 현장에서 많이 사용하잖아요. 공사 현장을 비하하는 게 아니라 그래도 건축자재보다는 미술 작품이 더 예뻐 보였으면 하는 마음이랄까요. 작품은 운반되는 순간에도 아름다워야 하니까요.”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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