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근함 표시로 가족 호칭 남용
혈연주의 기댄 구시대 사고 지적
“아버님! 박스 포장은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지난달 택배를 보내러 우체국에 간 박종호(51)씨는 청원경찰의 ‘아버님’ 소리가 듣기 영 거북했다. 살뜰하게 고객을 응대하려는 의도란 건 알겠지만, 난생 처음 보는 청년에게 아버지 소리를 왜 들어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든 것. 박씨는 “과공비례(過恭非禮·지나친 공손은 무례)라는 말도 있듯, 자칫 불쾌감까지 줄 수 있는 잘못된 호칭이라고 생각한다”고 민원을 넣었고, 3일 뒤 해당 우체국으로부터 앞으로 ‘고객님’을 사용하도록 교육하겠다는 답변을 받아냈다.
직장인 신모(29)씨는 요즘 옷을 사러 갈 때마다 직원의 ‘언니’라는 호칭이 거슬린다. 신씨는 “점원이 ‘언니’라 부를 때마다 왠지 부담스러운 마음이 든다. 빨리 자리를 떠나고 싶을 정도”라고 말했다. 아무리 친밀하게 고객을 대하기 위한 것일지라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에 공적인 호칭을 불러야 한다는 게 신씨 생각이다.
관공서에서, 식당에서, 직장에서 친근함을 표시하기 위해 혹은 예의를 갖추려고 사용되고 있는 ‘언니’, ‘아버님’, ‘형님’ 같은 호칭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이들이 등장하고 있다. 너무 예민하게 군다는 말도 간혹 듣지만, 이처럼 가족 호칭을 남용하는 게 결국 공사 구분 없이 ‘혈연주의’에 기댄 구시대 사고의 반영인데다 우리말 예절에도 맞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14년 차 직장인 한모(39)씨는 후배들 앞에서 “힘든 일 있으면 형처럼 생각하고 편하게 말하라”는 조언을 입에 달고 산다. 말 그대로 ‘형’처럼 마음 터놓고 지내자는 의도지만, 후배들 반응은 그리 좋지 않다. 그는 “일을 시키거나 할 때는 선배고, 자기 편할 때는 형이냐는 후배들 불만을 듣고는 마음이 편치 않더라”라며 “공사 구분을 하지 못한다는 구설에 오를까 봐 조마조마하기도 하다”고 토로했다.
‘언니’ 호칭에 웃지 못할 일도 가끔 발생한다. 2015년 수도권 한 약국에서 손님 A씨가 약사 B씨에게 ‘언니’라고 불렀다가 약사가 “의사에게 오빠라고 부르면 기분이 좋겠느냐”라며 맞서고 싸움이 벌어지면서 경찰까지 출동한 것이다.
호칭에 반기를 드는 이들은 국립국어원이 2011년 발간한 ‘표준 언어 예절’을 근거로 대기도 한다. 식당, 관공서 등에서는 손님 성별이나 나이에 관계 없이 ‘손님’으로, 직장에서는 이름과 직함을 붙여 부를 것을 적절한 언어 예절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 흔히 손님이 직원을 부를 때 ‘여기요’ ‘아주머니’ ‘아저씨’라 부르는 게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오히려 ‘언니’나 ‘이모’ 등으로 부르는 것보다는 우리말 예절에 부합한다는 게 국어원 설명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젊은이들 중심으로 개인주의와 합리주의가 확산하면서 과거 유교 질서나 가족중심 사고를 거부하는 과도기 양상으로 풀이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가족 호칭을 남용하다 보면 공적인 일 처리도 온정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라며 “관공서 등 공공기관부터라도 의식적으로 바른 호칭을 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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