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소리로 비가 그쳤다는 걸 가늠하는 삶이 도시 한복판에서 가능할까. 올 봄 서울 도봉구 쌍문동에 지어진 닮담집은 꼭대기에 주인세대가 사는 4층짜리 다가구주택이다. 뒤로는 야산이 감싸고 앞으로는 북한산과 도봉산이 펼쳐진 이 땅에 자리잡은 이들은 인근 우이동에서 마트를 운영하는 부부다. 닮담집은 1년 365일, 새벽 5시에 문을 열어 새벽 1시에 문을 닫는 가게를 4년째 지켜온 부부가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다.
열심히 일한 나에게 주는 선물
“저희 집이 우이동에서 6대째 살고 있어요. 가게도 그때부터 했죠. 아마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마트일 거예요.” 건축주의 집은 대대로 ‘슈퍼마켓 집’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우림상회로 시작한 가게는 우림마트로 이름이 바뀔 때까지 수십 년간 한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참 신기해요. 어떻게 한 곳에서 그렇게 오래 있을 수 있는지… 그래서 저도 이 동네를 떠날 수가 없어요.”
태어날 때부터 마트와 운명을 함께 한 건축주는 결혼한 뒤에도 우이동과 쌍문동 등지의 빌라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러던 그들이 집 짓기를 결심한 건 “휴식이 간절해서”다. “마트 일 자체는 즐거워요. 하지만 1년 내내 가게에 붙어 있다 보니 통장에 돈만 쌓이면 뭐하나 싶더라고요. 우리가 남들처럼 여름 휴가를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집에 있는 것 자체가 휴가처럼 느껴졌으면 했어요. 빌라에서 10년 넘게 살다 보니 판에 박힌 구조에도 싫증 나던 참이었습니다.”
건축주 부부가 고른 땅은 오래된 주택이 밀집한 쌍문동 경사지의 막다른 골목이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며 걱정하던 김미희ㆍ고석홍 소장(소수 건축사사무소)은 대지에 도착한 뒤 걱정을 날려버렸다. “북한산 인수봉이 정면으로 보이는 거예요. 건축주가 원했던 집이 ‘열심히 일한 자신들에게 주는 선물 같은 집’이었는데, 저 경관을 선물로 드리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처음엔 단독주택을 계획했으나 2인 가족이 사는 집치곤 쓸 수 있는 면적이 많았다. 북한산을 제대로 담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높이가 필요하기도 했다. 결국 1층엔 주차장, 2,3층엔 임대세대, 꼭대기 층에 주인세대가 사는 다가구주택으로 결정됐다.
거실의 용도는 말할 것도 없이 북한산을 담는 것. 그러나 북한산에서 도봉산까지 연결되는 수려한 능선을 다 담기엔 창 하나로는 부족했다. 건축가는 과감히 TV를 포기했다. “일반적인 한국 거실은 한쪽 벽면에 소파, 반대편에 TV를 놓을 걸 상정하고 설계해요. 하지만 실은 이것 때문에 잃는 게 굉장히 많아요. 닮담집의 경우 각도를 계산해보니 만족스런 전망이 나오려면 TV를 놓을 수가 없었어요. TV와 북한산 중 저희의 선택은 당연히 산이었습니다.”
건축가들은 거실 서쪽 모서리의 벽 두 개를 할애해 큰 창을 냈다. 연결된 두 개의 창으로는 눈 앞의 능선이 파노라마로 끊김 없이 담긴다. 처음 이 땅을 택할 때 뒤편의 야산이 좋아 택했다는 부부는 “북한산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 못했다”며 만족해했다.
남편은 “사실 TV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며 웃었다. “집에 오면 늘 TV 앞에 늘어져 있었거든요. 그게 유일한 휴식이었고요. 그런데 한 달 정도 TV 없이 살아보니 그게 휴식이 아니었더라고요.” 지금 부부의 휴식은 테이블에 앉아 북한산을 보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걸로 바뀌었다.
집 주인 개성 반영한 “도심형 단독주택”
TV는 사라졌지만 대신 전용 놀이공간이 생겼다. 다락 층고를 법규상 최대 높이까지 올려 일종의 오락실로 만든 것. 빔 프로젝터에 스피커, 작은 홈바까지 갖춰진 이곳은 영화관을 갈 시간이 없는 부부의 작은 영화관이자 공연장이다. 휴일 없이 일하는 이들에게 다락에 올라올 시간이 있을까 싶지만 부부는 “매일 퇴근하고 새벽 3시까지 여기서 놀다가 잔다”고 했다. “원래 가게문을 새벽 1시에 닫았는데 이제 12시에 닫으려고요. 집에 빨리 오고 싶어서요.”
아래 임대세대 4가구에는 빌라 생활 11년 경력을 총동원해 “한풀이”를 했다. 층간소음으로 고생했던 기억을 떠올려 고층 아파트에서 사용하는 소음재를 넣고 중문을 달기 어려운 구조임에도 굳이 중문을 설치했다. 건축주는 “단열재 두께, 보일러 세기까지 신경을 썼다”고 강조했다. “보통 집을 구할 때 평수나 위치만 고려하는데 살아보면 그게 전부가 아니거든요. 건축주가 얼마나 신경 써서 집을 짓는지가 동네 질을 좌우하는 것 같아요. 저는 이 동네를 오래 지켜본 사람이니만큼 욕심이 있었어요. 싸게, 똑같이, 빨리 짓는 빌라 대신 제대로 지어서 오래도록 동네의 풍경이 되는 그런 집이요.”
사선의 대지에서 직각을 확보하느라 건물 측면은 계단처럼 모가 났다. 여기에 가파른 지붕까지 더하면 멀리 북한산의 험준한 바위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자연을 닮은, 자연을 담는 집이란 의미의 닮담집은, 최근 도심 주택가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주거 유형이다. 젊은 부부나 1인가구 중 “단독주택의 개성은 누리고 싶으나 지을 여력은 없는” 사람들이, 임대세대를 끼고 꼭대기에 자기 집을 짓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 이럴 경우 임대수익 보다는 자기 집을 짓는다는 개념이 강하기 때문에 외관이나 내부에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임대세대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는 편이다. 김미희 소장은 이에 대해 “기존의 빌라와 구분되는 다른 명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은 높은 지가 때문에 단독주택 짓기는 사실상 불가능해졌어요. 하지만 단독주택을 원하는 사람은 많고 그들이 대안으로 찾는 게 닮담집 같은 유형입니다. 임대수익 보다는 삶의 질에 초점을 맞춘, 사실상 ‘도심형 단독주택’인 셈이죠. 이런 경우 기존 다가구주택들과는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도심 주택가에서 하나의 트렌드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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