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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하던 형이 돌아오며 다시 악몽
조금이라도 비위 거스르면 주먹
참다 못해 부모에게 털어놓았지만
“지금까지 잘해 놓고 왜…” 지청구
취업 준비생이지만 집 나갈까 고민
자취하던 형이 다시 부모님 댁으로 들어와 같이 살게 된 후로 살이 4㎏이나 빠질 정도로 하루하루가 너무 괴롭습니다. 오래 전부터 형에게 지속적인 폭행을 당해왔어요. 평소에도 까칠한 성격이었던 두살 터울의 형이 절 처음 때린 건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어요. 단순한 형제간의 다툼이 아니라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방적인 폭행이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형은 부모님이 안 계실 때만 제게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했어요.
형은 학창시절 소위 말해 문제아였습니다. 공부도 하지 않았고, 경찰서에 합의금을 내야 한다며 부모님의 돈을 뺏어 갔어요. 형이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집을 나가 괜찮아지는 듯했지만, 어쩌다 형이 집에 오는 날은 온 가족이 초긴장상태였습니다. 아버지와 형이 부딪힐까 살얼음 위를 걷는 것만 같았습니다. 형이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시골로 귀농을 했습니다. 그 당시 형은 시골에 가는 걸 싫어했고, 부모님은 그래서 형이 비뚤어진 데 자신들의 책임도 일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하지만 부모님은 어릴 때부터 형을 좀 더 귀하게 키워왔습니다. 형은 종합학원, 컴퓨터학원 이것저것 다녔지만, 저는 학원에 보내주지 않았거든요. 어머니는 집에 돈이 많지 않고, 형을 잘 키워놓으면 형이 절 거둬 키워줄 거라 말씀하시기도 했어요.
부모님을 배려하는 마음 면에서 제가 형보다 훨씬 잘해왔다고 생각해요. 밭일과 논일, 축사 청소와 사료 주는 일 등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많이 도왔어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공부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EBS강의와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사교육 한 번 받지 않고 서울 4년제 대학에 합격했어요. 좋은 성적으로 장학금도 받았고, 항상 성실하고 떳떳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신임도 받아 총학생회 부회장을 하기도 했어요. 부모님도 속상한 일을 말씀하시거나, 무언가 부탁할 땐 항상 제게 하셨습니다.
그 동안 저는 부모님께 형의 폭행을 말하지 않고 제가 참는 쪽을 택해왔어요. 아버지도 욱하는 성격이 있어 형과 갈등이 많았고, 중간에서 어머니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이에요. 형의 사춘기가 지나면 웃으면서 이야기 할 날이 올 거라고도 생각했어요. 하지만 성인이 된 지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신의 기분에 조금이라도 거스르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 소리를 지르고 폭력을 행사하는 형을 더 이상 참아주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한 달 전 사실을 알렸지만, 부모님은 제 편이 되어주지 않았어요. 행여나 형이 잘못될까 걱정이고, 제가 받은 고통이나 상처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어요. 오히려 “지금까지 잘 해놓고 왜 그러냐, 너 때문에 엄마 아빠 속상한 건 안보이냐”라는 말을 하십니다.
최근 형이 다시 부모님댁으로 들어온 이후, 형은 걸핏하면 부모님께 성질을 냈어요. 창문 열어놓는 걸 좋아하시는 어머니에게 창문도 열지 못하게 하는 등 부모님의 모든 걸 통제하려 했고요. 어머니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아 저녁식사 시간에 형에게 한 마디 했습니다. “어머니가 놓고 싶은 물건을 놓게 내버려두라”고 정말 부드럽게 말 한마디 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형은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제 목을 조르며 욕을 했고, 물건을 집어 던졌습니다.
저도 성질이 있고 주먹이 있어요. 하지만 최악인 상황만은 막고 싶어서 형을 때리지 않고 참았습니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포기를 하신 건지, 일을 덮기에 급급한 모습이에요. 억울하고 분해도 저만 참으면 된다고 하십니다. 해결을 할 의지도 능력도 안보입니다. 그 동안은 부모님이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가족 중 제 편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형은 제게 단 한 번도 사과를 한 적이 없어요. 부모님은 오히려 제게 형의 기분이 안 좋으니 먼저 다가가서 형 기분을 풀어주라는 말씀을 하시고요.
처음엔 형에 대한 분노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집에 아무도 믿을 사람도 없고, 의지할 사람도 없네요. 지금 당장이라도 집을 나가고 싶고 가족 모두와 연락을 끊고 지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 통장에 있는 돈은, 인턴을 할 때 저축해놓은 돈이 전부이고 집을 나가도 3개월밖에 버티지 못할 돈입니다. 현재 취업을 앞둔 중요한 시기라 선뜻 결정을 못하겠습니다. 취업을 한 후 부모님과도 연을 끊고 싶은 생각을 하는 제가 잘못된 건가요?
정태우(가명ㆍ27ㆍ취업준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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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태도에 슬픔과 섭섭함 넘어
삶의 근간이 무너지는 느낌들 듯
문제 형 대신 착한 아들 노릇해 와
‘동생이니까, 아들이니까 참아야…’
이제 굴레에서 벗어나 독립하길
가여운 태우씨, 착한 태우씨 몸과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태우씨는 지금까지 너무나 오랫동안 형의 부당한 폭력을 참아 왔어요. 당연히 참아야 하는 걸 참은 게 아니라, 도저히 불가능한 인내를 해 왔습니다. 태우씨에게 잘못이 있다면, 참을 수 없는 상황을 온 힘을 다해 참은 것밖에는 없어요.
그리고 이제는 못 참겠다고 말하는 게 너무나 당연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태우씨에게 또 다시 참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부모님에게는 태우씨의 오랜 인내가 당연한 일로 여겨질 수 있어요.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가족들이 피해자에게 “너만 참으면 우리 모두 잘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상황이에요.
부모님도 태우씨 형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 폭력적 행동을 눈감아 주었어요. 그런데 이러한 부모님의 행동은 의도와 무관하게 첫째 아들의 폭력성을 그의 정체성으로 인정한 셈이 돼버렸습니다. 마치 ‘도둑이니까 도둑질을 하지’라고 생각해버리는 것처럼요. 태우씨에게 “지금까지 잘 참아 놓고 왜 그러냐”고 하는 말 속에는 태우씨 형은 원래 그러니 다른 사람이 참는 게 옳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어요. 태우씨 가족은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타인을 때릴 권리가 없다는 기본 전제부터 가져야 합니다.
지금 태우씨 마음은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너덜너덜해져 있을 것 같아요. 태우씨는 기본적으로 착하고 불평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일 거예요. 그런데 오죽하면 가족과 연을 끊고 싶다고 말 하는 걸까요? 보통 억울하다는 말 속에는 화와 분노가 들어차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태우씨는 화가 많이 났다기보다는 너무나 상처를 받아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것 같아요. 태우씨는 부모님에게도 아들로서 최선을 다하려고 했던 착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부모님에게 요구한, 형으로부터의 보호를 받지 못했어요. 자신의 삶의 근간이 무너져버린 것과 같은 좌절감을 느꼈을 거예요. 태우씨가 가족과 단절하고 싶어하는 마음 속에는 그런 슬픔과 섭섭함, 서운함이 들어있는 것 같아요.
태우씨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형의 폭력을 참아 왔을까요? 태우씨가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부모님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며 ‘나라도 그러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한 착한 아들이었어요. 그렇게 했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듯한 느낌도 있었을 거예요. “너는 신경 쓰이게 하지 않아서 좋다”같은 말은 자녀의 평생을 좌우하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이 말 그 자체가 태우씨의 모습이 돼 버린 것 같아요. 인내하는, 착한 아들로 있는 게 부모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는다는 느낌을 받았을 수 있어요.
저는 태우씨가 자신의 인간관계에서 갈등 없이 지내는 걸 목표로 두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인간관계의 원칙은 타인과의 갈등이나 오해가 생기면 풀어가는 거예요. 상대방을 이해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입장도 이야기하면서 서로 소통하며 풀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갈등이 없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사람은 갈등이 생겨도 본인이 참아버립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요. 갈등 상황에서 적당하게 참는 경우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 되지만, 지나치게 되면 오히려 자신에게 상처를 남겨요. 마지막 한 방울의 죽을 힘까지 짜내서 참아 온 태우씨에게 “힘들면 진작 말하지, 말 안 했으니까 몰랐지”라며 그 원인을 돌려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도저히 참지 못할 만큼 힘든 건 상대방에게 이야기를 해도 괜찮아요. 앞으로의 인간관계에서 태우씨가 이점을 반영한다면 도움이 될 거예요.
그리고 태우씨, 형은 가족이 참아준다거나 더 많이 사랑을 준다는 걸로 폭력성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아셔야 해요. 형은 의사를 만나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태우씨 형은 자신의 문제에 대한 인식도 전혀 못하고 있어요. 가족들이 지금까지 형의 눈치를 보며 참아왔기 때문에 문제가 더 심해졌다고도 볼 수 있어요. 태우씨 형의 인생으로 봤을 때도 가족들이 지나치게 참아주는 건 전혀 좋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태우씨가 형과 단절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태우씨가 더 참는다고 해도 형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당장 버틸 수 있는 돈이 3개월 치 밖에 없다고 해도 부모님 집에서 나올 것을 권합니다. 태우씨는 다른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고, 학창시절도 잘 보낸 것 같아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독립을 한다고 해도 어떻게든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거예요.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다는 이유로 형과 같은 집에 사는 건 정서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부모님과의 연까지 끊으라고 부추기는 건 아닙니다. 그건 나중에 시간이 흐른 뒤 부모님과 식사라도 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이 녹았을 때, 태우씨가 스스로 결정할 일이에요. 하지만 ‘동생이니까 참아야지, 아들이니까 부모에게 잘해야지, 가족이니까 이렇게 해야지’라며 스스로를 굴레에 가둬두지는 마세요.
태우씨 형은 치료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태우씨가 당사자에게 직접 그 이야기를 한다면 또 다시 폭행을 당할 가능성이 커요. 부모님 역시 아들에게 그런 말을 할 용기를 잃었을 것 같아요. 형이 치료 받을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은 폭력이 발생했을 때 신고하는 겁니다. 타인을 때리는 건 원래 안 되는 일이에요. 게다가 가족 내 폭행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만약 태우씨가 형을 치료받게 하고 싶다면 공권력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어요. 단지 형의 폭력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집을 나와야 하고요.
형의 폭력을 계속 참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불가능한 일을 계속 하면 태우씨는 물론 형과 부모님 모두의 병이 더욱 깊어질 뿐이에요. 형은 태우씨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습니다. 태우씨는 앞으로도 살아가야 할 인생이 많이 남아 있어요. 태우씨가 독립적인 성인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창조해 나가는 첫 발을 잘 내디디면 좋겠어요. 그 시작은 형과의 분리가 될 거예요. 가족이라는 이유로 부당함을 참으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누구도 그 어느 때라도 상대방을 때릴 권리는 없어요. 이점을 생각하며 태우씨의 행복한 인생을 그려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정리=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지면을 통해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신청해 보세요. 사연은 한국일보 사이트(http://interview.hankookilbo.com/store/advice.zip)에서 상담신청서를 내려 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에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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