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에게 연기력만큼 중요한 덕목은 ‘기다림’ 아닐까. 배우 강동원(37)을 보면 꼭 그렇다. 지난 2월 개봉한 ‘골든 슬럼버’는 기획부터 완성까지 7년 걸렸고, 최근 개봉한 ‘인랑’은 6년 만에 관객을 만났다.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던 때 일찌감치 캐스팅된 작품이라고 한다. “올해는 촬영 들어가겠지, 이번에는 하려나, 김지운 감독님이 ‘밀정’(2016)을 찍는다고 하니 한동안 촬영 못하겠구나, 그렇게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영화 개봉이네요.” 25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마주한 강동원은 “출연을 약속했으니 지켜야 했다”며 피식 웃었다.
일본 동명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한 ‘인랑’에서 강동원은 경찰 특기대 인간병기 임중경을 연기한다. 2029년 통일을 앞둔 혼돈기에 반통일 테러단체의 공격과 국가 정보기관의 음모에 맞서면서 인간의 길을 깨닫는 인물이다. 육중한 강화복에 감정을 숨긴 강동원은 “원작에 최대한 가깝게 표현하려 했다”며 “관객들이 저 캐릭터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대사에 생략된 임중경의 고뇌는 액션 장면에서 드러난다. 짓눌려 있던 야만성과 인간성이 동시에 폭발한다. 강동원은 모든 액션을 직접 소화했다. “관객에게 쾌감을 전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요. 또 저와 비슷한 동작을 하는 스턴트 배우를 찾기 어려운 이유도 있죠.” 남산 자동차 추격전은 “교통사고급”으로 위험했고, 정우성과의 격투 장면은 “영하 20도 강추위”와의 사투이기도 했다. 특히 40㎏에 육박하는 강화복을 입고 액션을 할 때는 “군대 행군은 저리 가라 할 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입이 쩍 벌어지도록 탁월한 지하 수로 액션 장면이 탄생할 수 있었다. “가장 힘들게 찍은 영화로는 ‘전우치’(2009)와 ‘인랑’이 제 인생 ‘톱2’에 들 겁니다.”
애니메이션의 실사화가 한국에선 흔치 않는 시도임에도, 강동원에게는 낯선 도전으로 비치지 않는 건 그가 줄곧 모험적인 행보를 걸었기 때문이다. 기이한 판타지 ‘초능력자’(2010)부터 악역 변신이 돋보인 ‘군도: 민란의 시대’(2014), 오컬트 장르 ‘검은 사제들’(2015), 독립영화 감성이 깃든 ‘가려진 시간’(2016)까지 출연작의 소재와 장르를 종잡을 수 없다. ‘1987’(2017)처럼 사명감이 필요한 작품도 있다. 지난 정부의 서슬 아래 비밀리에 기획된 ‘1987’은 강동원이 가장 먼저 출연을 결정한 덕분에 캐스팅과 투자가 이뤄졌다. “필모그래피가 좀 희한하긴 하죠(웃음). 저의 실험적인 선택을 관객들이 알아주면 다음에도 시도할 수 있는 힘이 생겨요.”
강동원의 다음 행보는 할리우드다. 9월부터 영화 ‘쓰나미 LA’를 촬영한다. 예정대로라면 올 여름 촬영이 끝났어야 하는데 늦어졌다. ‘기다림’의 미덕을 아는 그는 “새로운 문화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주어진 셈”이라고 했다. 해외 활동뿐 아니라 영화 기획에도 관심이 많아 틈틈이 시놉시스도 쓰고 있다. “데뷔 때 목표가 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어요.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보다 올림픽을 개최하고 싶다’고요. 아시아 마켓을 더 키우고 싶은 꿈도 있어요. 이제 현실이 돼가는 것 같아요.”
기획자로 만들고 싶은 영화를 묻자 답변이 술술술 거침이 없다. “우주로도 나가고 싶고, 진짜 섬뜩한 공포나 슬픈 멜로도 만들고 싶어요.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영화도 좋겠죠. 그런데 지금은 올스톱이에요. 영어 공부하고 나면 아무것도 못하겠어요. 영어도 어려운데 감정 연기까지 해야 하니 엄청 힘드네요.” 미국에서 혼자 운전하고 다니느라 검게 탔다는 팔뚝을 쓱 문지르며 강동원이 머쓱하게 웃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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