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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열전] ‘단기전의 신’ 김인식 감독

입력
2018.08.0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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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프리미어12 당시 김인식 야구대표팀 감독. 연합뉴스
2015년 프리미어12 당시 김인식 야구대표팀 감독. 연합뉴스

지난해 3월, 김인식 감독은 한숨을 삼켰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팀을 이끌고 안방에서 열린 4회 대회에 나선 김 감독은 1라운드 탈락의 수모를 당했다. 대한민국 야구에 ‘위대한 도전’의 역사를 써 오던 ‘국민 감독’의 쓸쓸한 퇴장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돌을 던지지 못했다. 김 감독은 국가대표를 처음으로 맡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는 6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2006년 제1회 WBC에서는 4강 신화를 쓰며 세계 무대서 한국 야구의 경쟁력을 입증했다. 이후 2009년 제2회 WBC에서는 준우승의 성과를 냈고, 오랜만에 현장으로 돌아온 2015 프리미어12에서는 깜짝 우승으로 ‘단기전의 신’임을 재확인했다. 2000년대 중ㆍ후반 야구대표팀의 호성적은 국내 프로야구의 흥행으로 직결됐다. 한국 야구의 르네상스를 연 그는 2006년 “국가가 없으면 야구도 없다”고 했고, 2009년 4강을 앞두고는 “우리는 이제 위대한 도전을 하려고 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잘하면 ‘본전’, 못 하면 ‘역적’인 ‘독이 든 성배’,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던 국가대표 사령탑으로 살아온 그의 직업은 ‘국가대표 감독’이었다.

 ‘국민 감독’의 서막을 열다 

한국 야구대표팀은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박찬호와 김병현 등이 포함된 ‘드림팀’을 꾸려 사상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4년 뒤인 2002년, 아시안게임이 열린 장소는 안방 한국의 부산이었다. 역시 프로야구 최정예 멤버로 구성된 대표팀이 출범했다. 한국 야구가 선택한 사령탑은 두산 감독으로 있던 베테랑 김인식 감독이었다. 한국 야구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이 절실했다. 지난 대회 우승팀의 자존심을 지켜야 했으며 그해 6월 열린 한ㆍ일 월드컵 열기로 한풀 꺾인 야구 인기를 되살려야 했다. 때문에 김 감독은 최고 선수들로 엔트리를 구성했다. 아마추어 선수는 정재복(인하대)이 유일했을 만큼 프로 선수의 비중이 가장 높은 대회였다. 금메달 경쟁 상대는 역시 대만과 일본이었다. 대만은 방콕 대회 때처럼 궈홍치와 왕젠밍 등 해외파를 소집해 탄탄한 전력을 구축했다. 사회인야구 선수 위주로 출전했던 일본도 프로구단에서 유망주들을 일부 소집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자 국내파로만 대표팀을 구성한 한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첫 경기인 중국전 8-0 승리를 시작으로 대만(7-0)과 필리핀(15-0)을 압도했고, 일본마저 9-0으로 꺾고 준결승에 올랐다. 중국과 준결승에서 한국은 초반 상대 선발 장찌엔왕의 느린 변화구에 고전했지만 2-2로 맞선 6회말 이승엽(삼성)의 적시타로 균형을 깬 뒤 7회 대타 이종범(KIA)의 2루타를 앞세워 7-2로 승리했다. 3회 연속 결승에 진출한 한국은 대만과 금메달 결정전에서 4-3으로 1점 차 짜릿한 승리를 거두고 6전 전승으로 대회 2연패에 성공했다. 소집부터 훈련, 대회 기간 내내 선수단을 잘 아울러 디펜딩 챔피언이자 주최국의 부담을 극복해낸 김 감독은 일약 ‘명장’의 반열에 올라섰다.

 지도자로 꽃피운 천생 야구인 

김 감독은 실업 야구계에서 10년간 최고 강팀으로 군림했던 한일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어깨에 탈이 나 선수 생활을 일찍 마감한 김 감독은 은행에서 일을 하다 모교인 배문고의 러브콜을 받고 지도자로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상문고를 거쳐 동국대에서 1985년까지 감독을 하다가 김응용 감독과의 인연으로 이듬해 프로야구 해태 코치로 옮겨 4년 내내 우승을 경험했다. 1990년에는 신생팀 쌍방울 감독으로 부임해 3년간 지도했다. 만년 꼴찌에 배고팠던 쌍방울 감독 경험은 김 감독에게 훗날 소중한 자산이 됐다. 김 감독은 OB로 옮겨 마침내 화려한 감독 생활의 전성기를 열어젖혔다. 위기도 있었다. 한화로 지휘봉을 잡은 이후 뇌경색이라는 병마와 싸워야 했다. 발병 당시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위중한 상태였는데 한 달 만에 퇴원해서 전지훈련까지 갔다. 그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 같았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야구계 원로이자 대표적인 덕장으로 평가받는다. 두산에서 9년 동안 한국시리즈 우승을 두 번 일궜고 감독으로서만 무려 980승(역대 3위)을 거뒀다. 류현진, 김태균, 홍성흔, 김동주 등 수많은 슈퍼스타를 키워냈고, 외유내강의 성품으로 야구계에서도 신망이 두텁다.

무엇보다 지금의 '국민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안겨준 것은 역시 국제무대에서 남긴 강렬한 인상이었다.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리더십을 인정받은 김 감독은 WBC와 프리미어12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며 국제무대에서 한국야구의 위상을 드높이는 데 기여했다. 특히 모두가 기피하는 상황에서도 한 번도 국가의 부름을 거부하지 않았고, 오히려 항상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렸다는 점이다. 2009년 WBC가 대표적이다. 전년도 한국시리즈 우승팀 감독이 대표팀을 맡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2008년 우승팀인 SK의 김성근 감독이 대표팀 감독직을 고사했고, 앞선 순위의 감독들마저 차례로 난색을 표하자 다급해진 KBO는 당시 전 시즌 5위에 그친 한화 사령탑이던 김 감독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팀 성적으로나 건강 상태로나 누구보다도 맡을 상황이 아니었지만 김 감독은 고심 끝에 수락했다. 그는 취임 기자회견에서 김 감독은 "국가가 있어야 야구가 있다"면서 이기적인 야구계 행태에 쓴소리를 던졌다.

결국 한국야구는 그해 WBC에서 준우승이라는 성과를 올렸지만 김 감독 본인은 큰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대표팀에 전념하느라 소속팀 한화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한화는 그해 창단 첫 최하위로 추락하는 시련을 겪은 이후 지금까지도 가을야구 무대를 다시 밟지 못하는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김 감독도 결국 재계약에 실패하고 팀을 떠나야 했다.

 ‘선동열호’가 새겨야 할 메시지 

김 감독은 이후 지도자 일선에서는 물러나 한국야구위원회(KBO) 기술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야구계 원로로 남는 듯했다. 하지만 한국야구는 아직도 김 감독의 연륜과 헌신을 간절히 필요로 했다. 하지만 2015년 신생 대회인 프리미어12에서 한국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으며 6년 만에 현장 감독으로 복귀했다. 한국은 역대 최약체 전력이라는 우려를 비웃으며 초대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일본과의 준결승에서는 극적인 ‘도쿄대첩’을 연출하며 WBC에서 번번이 일본에 발목을 잡혔던 한을 풀었다.

국민 감독의 마지막 무대는 비참했다. 안방 고척돔서 개최된 2017 WBC A조 1라운드에서 2연패 후 가까스로 1승을 거뒀지만 2라운드 진출에는 실패했다. 대회 후 김 감독은 사실상 대표팀 감독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대표팀은 엔트리 구성부터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메이저리거들이 팀 내 사정이나 사건ㆍ사고에 휘말려 대거 불참했다. KBO리그의 주요 선수 중에도 부상 등으로 이탈한 선수가 있었고 국제 대회 경험 위주로 선발하다 보니 리그에서 가장 좋은 활약을 펼친 선수가 배제되기도 했다. 역대 최약체라는 평가가 대회를 치르기 전부터 나왔다. 엔트리 구성부터 잡음에 여러 잡음에 직면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을 앞둔 ‘선동열호’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당시 마지막 이스라엘전을 앞두고 김 감독은 “국제대회는 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 너무 긴장되고 걱정된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전 패배 후에는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노(老)감독은 대회를 준비하면서 최종엔트리 교체 때마다 아쉬움을 토로했고, 대회 기간 내내 선수들의 컨디션 걱정에 근심을 숨기지 못했던 김 감독은 눈시울을 붉혔다. 성적을 떠나 후배들이 맡지 않으려던 대표팀 감독을 받아들여 이끌어준 노고에 야구인들은 큰 박수를 보냈다. 성환희기자 hhsung@hankookilbo.com

●김인식 감독은

▲1947년 5월 1일 서울 출생 ▲배문중-배문고 ▲1965년 크라운맥주(한일은행) 입단, 최우수신인선수상 ▲1967년 제7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한국 대표팀 ▲1972년 현역 은퇴 ▲1973~77년 배문고 감독 ▲1978~80년 상문고 감독 ▲1982~85년 동국대 감독 ▲1986~89년 해태 타이거즈 코치 ▲1990~92년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1995~2003년 두산 베어스 감독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4~09년 한화 이글스 감독 ▲2006년 제1회 WBC 국가대표팀 감독 ▲2009년 제2회 WBC 국가대표팀 감독 ▲2015년 프리미어12 국가대표팀 감독 ▲제4회 WBC 국가대표팀 감독

●국제대회 성적

대회 승패 결과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6전 전승 금메달

2006년 제1회 WBC 6승 1패 4강

2009년 제2회 WBC 6승 3패 준우승

2015년 프리미어12 6승 2패 우승

2017년 제4회 WBC 1승 2패 1라운드 탈락

총 25승 8패(승률 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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