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시민단체 ‘마이보트’의 실험
“찬성∙반대 선택지만 주는 건
결과론적 민주주의일 뿐”
네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고
60% 이상 득표해야 확정
투표 결과 훼손 가능성 없고
정치 무관심 해소에도 기대
지난 6월 호주 멜버른 콜링우드. 멀리서도 민트색 ‘M’자 로고가 눈에 띄는 2층짜리 건물 1층에서 시민단체 마이보트(MiVote) 소속 세 명의 남녀가 정부의 부동산 규제 정책을 놓고 토론이 한창이었다. 이 건물은 도로와 맞닿은 한쪽 벽이 통유리라 외부에서도 내부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누가 봐도 상관 없다는 듯,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대화를 주고 받던 이들은 이따금 건물 앞을 지나는 동네 주민에게 손 인사를 건넸다. “지나가다 들렀다”며 약속 없이 찾아온 주민과 토론을 이어가기도 했다. 동네 주민인 앤지 지고매니스씨는 “매주 목요일 밤마다 누구나 방문해 정치나 사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오픈 하우스 행사를 하지만, 그 때가 아니더라도 편하게 방문할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시민 목소리에만 귀 기울이는 정치 운동
마이보트의 사무실 풍경은 여느 시민단체와 다름 없어 보이지만, 실은 블록체인 기술로 무장한 채 숙의민주주의를 실험하는 민주주의 혁신 흐름의 최전선에 서 있는 단체다.
마이보트는 주요 이슈가 있을 때마다 신생벤처기업(스타트업) 호라이즌 스테이트가 개발한 블록체인 기반 모바일 투표 시스템을 통해 투표를 실시한다. 투표 자격은 마이보트에 가입한 전 구성원에게 주어진다. 구성원들의 투표를 통해 결정된 의제만이 마이보트의 입장이 된다. 애덤 재코비 공동창립자는 “투표 시스템 기반 기술로 블록체인을 활용한 건 사람이 맡는 시스템 관리자와 달리 시스템 자체를 믿을 수 있고, 투표 결과의 훼손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라며 “블록체인은 마이보트 철학을 구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창립한 마이보트는 기존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시민 중심의 ‘진짜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는 목표를 내걸고 있다. 스스로 “시민들의 의지와 목소리에만 초점을 맞추는 독특한 정치 운동”이라고 소개한다. 재코비 마이보트 공동창립자는 “지금의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 시민들은 아무 힘이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몇 년에 한 번씩 정치인을 선출하는 것뿐이고, 그 이후에는 정치인 개인에게 모든 선택을 맡겨야 한다”며 “국가와 지역이 나아갈 방향, 정책을 시민이 직접 정할 수 있도록 힘을 길러주는 게 마이보트의 목표”라고 규정했다.
선택지는 항상 4개… 60%이상 득표해야 1위 인정
마이보트 플랫폼의 또 다른 핵심은 유권자가 이슈를 정확하게 파악한 뒤 의사를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준다는 점이다. 구성원이 어떤 이슈에 대해 투표를 하겠다고 선택하면, 가장 먼저 마이보트 연구팀과 이해 당사자, 각 분야 전문가들이 정리하고 팩트체크까지 마친 다양한 측면의 객관적 정보가 제공된다. 가령 ‘정치자금 기부 규제 강화’ 문제에 투표하겠다고 한 경우 정치자금 기부를 규제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왜 일고 있고, 현행 제도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의 주장 근거는 무엇인지 등의 정보를 먼저 읽어야 한다. 숙지하지 않으면 투표 단계로 넘어갈 수 없다.
선택지는 항상 4개를 준다. 어떤 이슈를 두고 찬반만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건 결과론적 민주주의일 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재코비 공동창립자는 “가령 총기규제 문제라면, 원칙적으로는 총기를 거래하거나 소유할 수 있게 하되 초등학교 인근 같은 키즈존에서는 보유나 이용을 엄격히 금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며 “총기를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 단 두 가지 선택지만 주고 ‘선택권은 유권자에게 있다’고 얘기하는 건 표면적으로 민주적일지라도 사실상 선택권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4개의 선택지 중 한 개가 60% 이상을 득표해야만 마이보트의 입장으로 확정돼 마이보트와 뜻을 함께하겠다고 약속한 정당이나 정치인, 기관 등에 전달된다. 단순히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 것은 네 가지 방안 중 어느 하나도 60% 이상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숙의의 과정이 더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재코비 공동창립자는 “만약 마이보트와 파트너십을 맺은 정치인이 투표 결과에 따르지 않는다면, 참 민주주의를 구현하겠다는 의지가 없는 것으로 보고 관계를 끊는다”며 “재선도 할 수 없다. 자기 정치를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10년 내 50개 국가서 정치인 배출할 것”
마이보트는 첫발을 뗀 지 이제 1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인도 미국 스코틀랜드에도 지사가 생겼다. 현재 인도에서만 100만명 이상의 구성원을 두고 있다. 재코비 공동창립자는 “향후 10년 내 50개 국가에서 마이보트와 파트너십을 맺은 정치인을 배출하고, 구성원 30억명을 확보하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마이보트에 거는 호주 시민들의 기대도 크다. 마이보트 소속인 멜라니 선더스씨는 “단순히 표를 던지는 것보다 이슈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마이보트 철학에 공감한다”며 “분명 호주 정치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고 말했다. 대학생 애니타 웹스터씨도 “누구나 자신의 의견이 실제 정책에 반영될 것이란 확신만 있다면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며 “마이보트가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없애는 데도 기여할 것이라 믿는다”고 했다.
멜버른=글ㆍ사진 이서희 기자 shle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