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알고 싶다] 노회찬의 ‘6411번 버스’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
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세상을 떠난 후 그가 2012년 진보정의당 당 대표를 수락하며 한 연설이 화제가 됐다. 노 의원은 6411번 버스 첫차를 타고 출근하는 청소노동자들이 ‘존재하되 우리가 그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투명인간이라고 말했다. 6년이 지났지만 안타깝게도 청소노동자들의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여전히 최저임금 준하는 월급을 받고 일터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받으며, 출근 시간보다 1시간 먼저 나와 근로계약서에 없는 ‘투명노동’을 한다.
‘없는 것처럼 있어야’ 하는 투명인간
기온이 섭씨 28도를 웃도는 3일 새벽 4시, 불이 모두 꺼진 아파트가 내려다보는 6411번 버스 기점에 청소노동자 강모(64)씨가 걸어왔다. 4년째 걷는 새벽 출근길이지만 하루도 고단하지 않은 적이 없다. 집에서 출발한 지 15분이 지났을 뿐인데 굵은 땀방울이 목덜미를 따라 흐른다. 한 손에 손 선풍기를, 다른 손엔 손수건을 들고 더위를 식혀보려 애쓰지만 땀은 멈출 생각이 없다. “안녕하세요?” 강씨는 다른 첫차 승객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곤 자리에 앉았다.
사실 강씨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정류장은 기점이 아니라 대림역 방면이다. 4년 전 강남구 빌딩으로 첫 출근을 했을 때는 집 근처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기도 했다. 신도림, 남구로역을 거쳐 대림역에 도착하는 6411번 버스는 대림역에 도착할 때쯤 이미 만석이 되는데 그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앞 사람의 발등을 밟지 않기 위해 온몸에 힘을 줘야 하니 버스에서 내리기도 전에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강씨가 잠을 줄여서라도 버스 기점까지 걸어 나오는 이유다.
“노회찬 의원이 말하기 전에 타지 그랬어”
강씨는 언론의 늦은 관심을 안타까워했다. 노 의원의 연설처럼 그는 ‘투명인간’처럼 일한다. 정해진 출근 시간보다 1시간 가까이 먼저 일터에 도착해 아무도 없는 건물의 쓰레기통을 비우고 화장실을 청소한다. 식사 시간엔 음식 냄새가 휴게실 밖으로 나갈까 마른반찬으로 도시락을 싼다. 찌개를 끓이기라도 하면 냄새가 온 건물에 퍼지는 것 같은 걱정이 들어 엄두도 못 낸다. 그렇게 하루 7시간, 주 5일을 일해 월급 140만원을 받는다.
전에 강씨는 대기업이 입주한 건물에서 일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한 ‘투명인간’이었다. 사장실 부근을 청소할 때는 ‘없는 사람처럼 있으라’는 이해하기 힘든 지시를 받기도 했다. 일터를 깨끗하게 만드는 데서 보람을 느끼고 자부심도 있었지만 그걸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6411번 버스를 타고 한티역 부근 빌딩으로 출근하는 A(64)씨도 마찬가지다. 그가 6411번 버스에서 내려 일터에 도착하는 시간은 오전 5시 30분. 정식 출근 시간보다 1시간이나 이르다. 그는 이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면 일찍부터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루 10시간의 노동, 그 대가에 이 1시간은 포함되지 않는다. A씨는 “그래도 그저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들 모두 ‘6411번’ 승객이다
노동시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새벽 ‘투명노동’은 6411번 버스 속 청소노동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604, 101 번호는 다르지만, 서울 곳곳을 지나는 새벽 첫차 속 청소노동자들이 직면한 현실은 6411번 버스 속 사람들의 현실과 닮았다.
6411번 버스가 첫 손님을 태우는 새벽 4시는 고려대안암병원 청소노동자 B씨가 일터에서 도착하는 시간이다. 본격적인 진료가 시작되기 전에 청소를 마쳐야 하는 병원의 특성상 제일 바쁜 건 오전 청소. B씨에게 할당된 구역을 청소하려면 3시간은 족히 걸린다. 혈압약을 먹으려면 아침을 챙겨 먹어야 하기에 B씨의 기상 시간은 새벽 2시 30분. 오전 8시까지 3시간 이상을 청소하고 나면 어느새 속이 쓰려온다.
같은 병원 청소노동자 C씨는 집에서 나와 새벽 4시 30분이면 버스에 몸을 싣는다. 강북으로 가는 6411번 버스 속 청소노동자들이 노들역에서 내려 버스를 갈아탈 시간이다. 5시에 일터에 도착하면 6시까지 1시간을 더 일하는 셈이지만 이는 계약서에 없는 ‘투명 노동’이다. C씨는 “1시간 더 일한다고 휴식시간을 붙여주는 것도 아닌데, 식사를 1분이라도 빨리했다고 경위서를 써야 하는 게 현실”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용역 업체는 “계약서상 출근 시각은 오전 6시로 일찍 나오는 분들은 자발적으로 나오는 것”이라며 “식사 시간에 휴식 시간을 늘려주면 도덕적 해이가 발생한다”는 입장. 원청인 병원 측은 “이미 시정된 문제로 안다”며 실태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병원과 용역 업체의 이런 입장과 다르게 많은 수의 청소노동자들이 오전 5시부터 바쁘게 맡은 구역을 청소한다. 6년간 고려대안암병원에서 일했다는 D씨는 “회사는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휴식시간을 더 주지도 않는다”며 “돌아오는 건 ‘너희가 필요해서 일찍 나온 거 아니냐’는 답변뿐”이라며 분노했다.
늘어나는 건 나이뿐
청소노동자들의 삶은 노회찬 의원의 ‘6411번 버스 연설’ 이후로 몇 정거장이나 나아갔을까. 강남의 빌딩에서 청소 노동을 하는 이모(66)씨가 한 달에 받는 돈은 142만원. 어떤 추가 수당도 없이 노동시간에 최저임금을 곱한 금액이다. 해가 바뀌면서 최저임금이 10% 이상 올랐지만, 월급은 채 10만원도 오르지 않았다. 일터를 옮기면서 근로시간이 줄었기 때문인데 이전 직장에서 이씨는 계약 기간 1년의 ‘계약직’이었지만 지금은 6개월 ‘촉탁직’으로 고용 형태마저 불안해졌다.
이는 이씨에게만 국한된 변화가 아니다. 성재민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과 안정화 한국기술교육대 고용노동연수원 교수가 통계청 자료를 재분석한 ‘저임금 일자리의 동태적 변화와 정책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청소노동자의 평균연령은 59세에서 62세로 3세 증가했지만, 월급 인상률은 -0.1%였다. 시간당 임금이 17% 올랐지만 평균 근로시간이 21% 줄면서 월급만 ‘제자리걸음’한 것이다.
이씨는 노회찬 의원의 사망 소식을 듣고는 “실낱같은 희망이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를 청소노동자와 같은 약자를 위해 발 벗고 나서주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노회찬 의원은 2016년 국회 청소노동자들이 휴게공간을 잃을 처지에 놓이자 “내 사무실을 같이 쓰자”고 선뜻 손을 내밀었다. “6411번 버스를 아십니까”하고 물었던 정치인이 사회에 보여준 양심이었다.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 6년 전 노 의원이 던진 화두는 청소노동자들의 새벽 땀방울 속에서 그 의미를 잃지 않고 있다. ‘투명인간’들이 자기 색채를 되찾게 하는 것. 노 의원이 우리 사회에 남기고 간 숙제다.
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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