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는 가정적이고 좋은 아빠인 남편은 한 번 욱하면 애가 돼버립니다. 고작 8세인 초등학생 아들에게 말이에요. 예를 들어 전에 남편이 사줬던 게임기를 부쩍 커버린 아들이 재미 없어서 더 이상 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남편은 게임기와 게임팩을 모조리 상자에 넣어버리고는 테이프로 밀봉까지 해서 치워버립니다. “다시는 하지 말아라”라고 하면서요. 아이 때문에 삐쳐있는 아빠라고 해야 할까요?
제 생각에 남편은 자기 객관화를 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남편은 평소에도 화가 나면 욱하는 성격이에요. 아이가 학교에서 욕을 쓴다고 하면 그게 자신 때문인 것도 알지만 인정하려고 하지 않아요. “어차피 욕은 크면서 다 알게 되는 거 아니냐”면서요. 아들이 남편이 하던 장난을 학교에서 했는지, 선생님이 자제를 부탁한다고 하더라고요. 남편은 “다시는 아들에게 장난치지 않을 거다”라면서 속 좁게 행동해요.
아이는 결국 부모의 행동을 보고 배우는 거잖아요. 제 남편은 그걸 왜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자신도 잘못을 깨닫고 같이 고쳐나가야 하는 건데, 아이에게 다시는 장난치지 말라고 윽박지르고, 놀아주지 않을 거라고 하고, 말도 걸지 말라고 합니다. 아이가 점점 진심을 말하기 어려워질 것 같아 걱정돼요.
예전에 오은영 박사님께서 출연하신 프로그램에 나왔던 가족이 떠올라요. 어린 아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왕따’ 시키던 부모의 모습이요. 남편과 우리 아이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 같은데 전 그것도 남편에게 말을 못하겠어요. 또 욱할까 봐요. 남편과 시아버지가 성격이 똑같아요. 시어머니도 시아버지 때문에 많이 힘들어 했다고 들었어요.
저도 물론 부족한 엄마예요. 어릴 때 공부에 대한 부담과 다른 친구와의 비교 등으로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이런 건 저희 아이가 겪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아이를 혼내더라도 항상 미안하다고 말을 합니다. 웬만하면 아이에게 맞춰주려고 하고요.
저희 부모님은 교육열이 높았어요. 엄마는 자신의 이루지 못한 교사라는 꿈을 저를 통해 대리만족하길 바랐어요. 어릴 때부터 많은 학원을 다녔고 싫다는 말도 못하는 그냥 착한 딸이었습니다. 내성적이고 적응이 느린 편이었는데 엄마는 “왜 그것도 못하냐”고 말하곤 했죠. 중학생 때는 성적표가 나오는 날이면 부모님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마저 들었어요.
아빠는 외도를 했지만, 전 아빠를 좋아해요. 적어도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은 알거든요. 엄마에게는 나쁜 사람이었지만 딸에게는 항상 사랑을 주셨어요. 반면에 엄마는 정서적으로 절 따뜻하게 대해주기 보다 자신을 희생해 학원에 보내주는 걸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교사가 아닌 승무원이 되겠다며 대학을 마음대로 진학한 후부터 엄마는 절 부끄러워하고 미워하세요. 지금도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아요.
전 지금은 직업이 있고 아이를 키우지만 제 의지로 공부해보고 싶어 방송통신대 유아교육과에 다니고 있어요. 엄마는 모르게 하고 싶어요. 엄마가 좋아할 것 같아서요. 아이를 키우면서 옛날의 엄마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보고, 오히려 더 엄마랑 멀어지고 있어요. 엄마는 항상 “네가 애를 키워봐야 엄마 마음을 알지”하는데 저는 아이를 키우면 키울수록 어릴 때 제가 불쌍하고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우리 아이만큼은 제가 어릴 때 받은 상처를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이 엄마와 닮은 점이 있겠죠. 그래서 더욱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남편과 아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더 고민되고요.
김도영(가명ㆍ32ㆍ영어강사)
도영씨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인생이 언제나 행복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삶에서 조금씩 느껴지는 행복을 찾으며 살아가요. 그럼 사람은 언제 행복을 느낄까요? 저는 마음이 편안해야 행복할 수 있다고 답하고 싶어요. 마음은 다른 말로 하면 기분입니다. 조금 어렵게 말하면 정서라고 할 수 있어요.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해서 정서적 안정감을 유지해야 마음이 편안하고, 그래야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행복의 잣대는 돈이나 성적이 아니라 정서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정서발달은 당연히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감정발달은 후천적이에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잘 배우면 건강하게 자라게 할 수 있습니다. 공부나 운동은 부모가 아니더라도 학교와 학원처럼 배울 수 있는 곳이 있어요. 하지만 정서발달은 그렇지 않아요. 아이들은 일상 생활 속에서 양육자로부터 정서를 발달시키는 법을 배웁니다.
도영씨의 남편은 이러한 정서발달이 잘 돼 있지 않은 사람이에요. 특히 불편한 감정을 잘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여요. 불편한 감정도 종류가 다양해요. 도영씨 남편은 종류에 따라 감정을 적절하게 처리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모든 불편한 감정에 화를 내거나 삐치는 방법으로 대응합니다. 고작 여덟 살 밖에 안된 아들에게 다신 놀아주지 않겠다고 하고, 장난감을 버리겠다고 합니다.
자신의 마음이 불편해지면 그 원인이 상대방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를 탓하고, 감정적 되갚음을 하고, 심지어 상대가 좋아하는 물건을 버리거나 상황을 나쁘게 뒤집어 버리지요. 그리고 끝까지 본인의 감정상태와 대응방식에 당위성을 부여하죠. 그래서 다른 사람의 충고나 설명도 받아들이지 않고 언제나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가므로 변하지 않는 것 입니다.
정서발달이 잘 되려면 특정 상황에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 상태를 잘 포착해야 합니다. 불편한 감정을 포착한 뒤에 자신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인식해야 해요. 그리고 다양한 유형의 불편한 감정 중에서도 어떤 카테고리에 해당하는지,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 지속해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감정 상태에 맞게 감정을 다룰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상대방의 말을 듣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는 걸 깨닫고 나면 그 후의 해결 방법도 찾을 수 있는 거지요. 하지만 이 과정이 되지 않으면 기분이 조금만 좋지 않아도 화가 납니다. 화 나는 마음으로 인해 물건을 던지거나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요. 어떨 때는 자신이나 상대방이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분노와 섭섭함은 다른 감정인데 세분화해서 구별하지 못하는 거예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종류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도영씨 남편의 아버지도 남편과 성격이 비슷하다고 했어요. 도영씨 남편이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정서발달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단 얘기예요.
무엇보다 건강한 정서발달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도 생겨요. 정서발달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도영씨 남편처럼 자신의 아이에게도 공감을 잘 못하게 됩니다. 그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도영씨 남편의 감정 처리방식 때문에 아이가 부정적인 감정의 표현을 지나치게 억압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제 가장 큰 걱정은 아이가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나쁜 것이라고 인식하게 되는 거예요. 부정적 감정을 표현하면 상대방이 화가 나고 관계가 나빠진다고 느끼면 평생을 살면서 부정적 감정을 안전하고 편안하게 처리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긍정적인 감정만큼이나 부정적인 감정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편안하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해요. 부정적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억누른다고 그 감정이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그 감정은 나중에 다양한 다른 문제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어요. 위경련, 과민성대장증후군 같은 신체증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참다 참다 사소한 일에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도영씨 남편은 아버지로서 반드시 바뀌어야 해요. 남편도 물론 아이를 사랑할 거예요. 하지만 크고 작은 결정적인 순간에 남편이 아이에게 보이는 감정적 반응은 올바르지 못한 방법이에요. 정서는 죽는 순간까지 후천적으로 발달할 수 있어요. 남편도 자신이 배우지 못했다는 걸 알아차리고 노력하면 됩니다.
도영씨는 후천적으로 정서발달을 위해 많이 노력한 사람 같아요. 아버지의 외도를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감정이 메마른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의 친절하고 다정한 성격 덕분에 도영씨는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았어요. 그래서 남편에 비해서는 정서발달이 잘 된 사람이에요. 게다가 아버지의 외도로 인한 어머니와의 갈등을 보며 인간에게 편안한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고 있어요.
도영씨의 어머니 이야기도 해볼게요. 딸에게만큼은 사랑 표현을 많이 했던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차가운 분이었어요. 도영씨의 어린 시절 사연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아이들은 부모가 어떤 부모이기를 바랄까요? 부모로부터 무엇을 받기를 원할까요?
유아들은 “나를 예뻐해주면 좋겠다, 많이 놀아주면 좋겠다”고 해요. 조금 더 자란 아이들은 “나를 사랑해주면 좋겠다, 혼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고요. 언제나 부모가 자신을 가장 소중한 대상으로 대해주고, 조건 없는 사랑을 부모로부터 받고 싶어 합니다. 그 방식은 따뜻해야 하고요.
도영씨 어머니는 그런 분이 아니었어요. 감정교류를 거의 하지 않았어요. 공부하라는 말을 할 때도 많은 감정을 주고 받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도영씨에게 항상 결과와 빠른 행동만을 요구했던 것 같아요. ‘공부 시키는 것’도 물론 부모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예요. 그러나 공부하라는 내용 또한 부모와 자식 간에 연결돼 있는 튼튼한 마음의 다리를 통해 전달돼야만 부모의 사랑도 함께 느끼게 됩니다. 마음의 다리가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그저 건조하고 공허한 단어의 나열이 될 뿐이지요. 공부가 인생 과정 중 일부가 될 수는 있지만 공부가 삶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어요.
이 점을 기억하면서 도영씨는 아들의 감정발달을 많이 시켜주면 됩니다. 지금 해왔던 것처럼 따뜻한 방식으로 아들을 대해주세요. 다만 절대로 해선 안 되는 게 있어요. 도영씨가 아이 앞에서 남편의 감정반응을 옹호하는 겁니다. 남편이 유치한 방법으로 감정처리를 했을 때 아이에게 ‘아빠가 회사 일이 힘들어서 그래’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라고 해서는 안 돼요. 그렇다고 해서 ‘아빠가 잘 삐친다’라는 말을 하라는 게 아니라, 아이의 속상함을 수긍해줘야 한다는 거예요. “아빠가 너를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그 상황이었으면 우리 아들이 기분이 나빴을 거야. 엄마는 너를 이해한다”고요. 아이도 자신이 화가 나고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 정당한 감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니까요. 도영씨는 아이의 정서적 그릇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엄마가 되어 주세요. 도영씨 남편에게도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 해주고 싶어요. 자기 자신의 미성숙함을 인지하고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아빠가 되길 바랍니다.
정리=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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