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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장도라도 꺼내야 하나…” 성난 여성들, 오늘 거리로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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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장도라도 꺼내야 하나…” 성난 여성들, 오늘 거리로 모인다

입력
2018.08.18 09:00
수정
2018.08.18 10:35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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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운동 집회와 거리 둬 왔던 

 평범한 시민들도 “18일 시위 참가” 

 “피해자답지 않아서 무죄라니…” 

 “딸에게 이등시민 승계 못해” 

 # 

 적극 저항ㆍ고함 등 통념과 다르게 

 해외 연구선 성폭력 피해자 70%가 

 피해 당시 의지와 다르게 몸 굳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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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폭력 피해자 검증하려 드는 

 사법부ㆍ남성권력에 집단저항 확산 

그래픽 박구원 기자
그래픽 박구원 기자

#1. 5세, 2세 두 아이를 키우는 직장인 정모(35)씨와 남편 한모(37)씨는 18일 아이들 손을 잡고 거리로 나선다. 350여개의 여성ㆍ노동ㆍ시민사회단체가 모인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미투운동시민행동)이 이날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여는 성폭력성차별 끝장집회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 못살겠다 박살내자’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평범한 정씨 부부를 거리로 이끈 건 지난 14일 안희정(53) 전 충남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 결과다.

정씨는 “피해를 당한 뒤의 행동이 너무 의연해 ‘피해자답지 않았다’, ‘그러니 피해자의 말은 믿을 수 없다’는 식의 무죄 이유를 접하고 아연실색했다”며 “목숨을 건 저항 등이 피해자의 조건이라면 '위력에 의한 간음' 조항은 애당초 무의미한 것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판결 근거를 보고 너무 화가 났어요. 저 또한 회사 생활 중 성희롱 피해를 입었을 때, ‘과민반응하는 신참내기’로 몰리고 태도가 피해자답지 않다고 비난 받은 경험이 있어요. 피해 사실을 고발해서 제가 얻는 실익이 없을 뿐 더러, 인격살인에 가까운 2차 피해를 당하는데도요.”

이 ‘피해자다움’에 대한 통념을 지금 깨지 않으면 같은 일이 반복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남편 한씨도 “제2, 3의 김지은이 나오지 않는 세상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이끈 촛불시위에 참가한 것 외에 특정 사안에 목소리를 내려고 부부가 거리로 나서는 건 처음이다.

#2. 탄핵 촛불 정국에서도 아이들과 함께 광화문 네거리를 서성거리며 잠시 머릿수를 채워주고 왔을 뿐이라는 95학번 주부 김모(42)씨의 심정도 비슷하다. 평소 의사표출 방법으로 집회, 시위라는 형식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그는 며칠 밤잠을 설치고 나서 미투운동시민행동 집회 참가를 결심했다고 털어놨다. 안희정 전 지사 선고문을 구해 꼼꼼히 형광펜까지 그으며 정독했다는 김씨에게 이번 판결의 무게감은 그만큼 컸다.

“우리 모두는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무능한 대통령을 탄핵하면 민주주의가 실현될 줄 알았잖아요. 그런데 아니라는 걸, 여성 피해자 검증에만 집중하는 이번 판결을 통해 확실히 느꼈어요. 여성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말이 그렇게 사무칠 수가 없더라고요. 더 이상 여성은 최후의 식민지일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남편이 맡기로 하고 땡볕 아래 온종일 앉아있을 채비도 마쳤다. 생수를 여러 병 꽁꽁 얼리고, 간식과 모자 등 준비물까지 챙겼다. “이 더운 날 누가 시위에 나가고 싶겠어요. 어지간 해도 나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현행법과 제도는 여성을 언제까지나 호구로 볼 뿐이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내 딸들에게 이런 이등시민의 지위를 더 이상 승계시킬 수 없어요. 시민의 상식 수준에 닿지 못하는 사법부에만 더 이상 딸들의 운명을 맡겨둘 순 없습니다.”

정씨 부부와 김씨를 비롯해 이날 집회 참가를 예고하는 이들이 앞다퉈 손을 들고 있다. 교수, 운동가, 법률가 등 오피니언 리더부터 평범한 회사원과 주부, 가족에 이르기까지. 그 면면이 광범위하고 표정 또한 심상찮다. 남성 참가를 제한했던 ‘불편한 용기’ 주최 ‘성(性) 편파수사 집회’ 등과 달리 주최 측인 미투운동시민행동이 애당초 대중집회를 목표로 한데다, 특히 ‘안희정 1심 무죄’가 기름을 끼얹었다. 그간 일부 여성 집회 참가자의 극단 구호에 거리를 뒀던 이들도 “더는 못 참겠다”는 참가 예고를 밀물처럼 쏟아낸다. 지난해 탄핵 정국의 촛불 집회를 방불케 하는 확장성이다. 안 전 지사 판결이 낳은 공분으로 바야흐로 페미니즘 운동의 새 국면이 열렸다는 평가다.

법조계 일각은 “처음부터 쉽지 않은 재판이었다”, “2심 역시 쉽지 않다”는 논평을 내놓으며 안 전 지사 판결의 정당함을 말하지만, 이들 시민사회의 정서는 공분 그 자체다. 이 분노를 구성하는 주요 정서는 ‘재판부가 부당한 피해자다움을 요구하고, 이를 안 전 지사의 무죄를 판단하는 주요 근거로 삼았다’는 문제의식이다.

역시 18일 집회 참가를 예고한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며칠 전 진행한 대중강연에서도 이번 판결 결과에 분노한 질의와 토론이 쏟아졌다”며 “이번 집회가 ‘위력 관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피해자를 검증하려 드는 사법부 및 남성권력’에 대해 집단 저항이 시작되는 중요한 문지방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가해자에게 ‘당신이 확실히 예스(Yes)를 들었냐’를 묻지 않고 피해자에게만 ‘니가 노(No)라고 정말 했냐, 왜 더 적극적으로 말 안 했냐’를 따지는 상황을 뒤집지 않는 한, 이 사건은 모든 여성에게 자신의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실체 없는 ‘피해자다움’ 

이들 시민사회의 분노는 단지 법리나 법정증거주의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까. 전문가 및 현장 활동가들의 답은 ‘노(N0)’다. 실제 재판부가 선고문에 시종일관 드러낸 ‘피해자다움 검증’ 태도는 일반 법 감정, 현장의 정서, 해외 연구의 결과에 비춰 문제적이라고 볼 여지가 적지 않다는 얘기다.

1심 재판부가 공소사실 중 첫 사건, 즉 2017년 7월 30일에 발생한 ‘러시아 호텔 사건’에 대해 안 전 지사의 무죄를 판단하며 언급한 피해자 김지은(33ㆍ전 충남도 정무비서)씨의 태도는 크게 두 가지. 즉 피해 당시에 거절했으되 너무 소극적이었으며, 피해 이후엔 피해자라고 보기에 김씨가 너무 의연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는 피해자가 심리적으로 얼어붙는 상황일 정도로 매우 당황해 바닥을 쳐다보며 중얼거리는 방식으로 거절 의사를 표현했다고는 하지만, 피고인(안 전 지사)의 요구에 따라 피고인을 살짝 안는 행위로 나아가기도 했다는 것. 또 피해를 당했다는 몇 시간 이후부터 안 전 지사가 좋아하는 순두부 식당을 찾아 아침식사를 하려고 애쓰는 등의 행동을 해 피해를 잊고 열심히 일한 것뿐이라는 주장이 납득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폭력 상황에서 “피해자가 피 흘리며 싸운 게 아니면 즐긴 것”이라는 식의 이분법은 이미 현장, 해외 논쟁과 연구에서도 낡고 도태된 것으로 지적됐다. 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의 2017년 연구에 따르면, 강간 여성을 위한 응급 클리닉을 방문한 298명의 성폭행 피해자 중 70%가 피해 당시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몸이 마비되는 ‘긴장성 부동화’(Tonic Immobility)를 겪은 것으로 조사됐다. 세간의 상상과 통념처럼, 손에 잡히는 도구로 가해자를 때리며 저항하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문을 박차고 달려나가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는 것이다.

또 이들을 6개월간 추적 관찰한 조사에서는 당시 긴장성 부동화를 겪은 피해자 절반 이상이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PTSD)을 앓기도 했다. 연구 책임자인 애나 몰러 박사는 “이런 긴장성 부동화는 극한의 위협에 노출될 때 나타나는 정상적인 생물학적 반응이므로 저항하지 못한 강간 피해자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라며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흔한 이런 증상이 성폭행 피해자의 심리치료, 의대생의 교육, 법원의 판단 과정에서 고려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여성이 피해 상황에서 단지 싸우거나 도망가는 방법으로만 반응한다는 것은 미신에 가깝다는 얘기다. 얼어붙기도 하며 정신적으로 체념해버리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성폭행 사후 반응도 통념과 다르기는 마찬가지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1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1990년대 중후반 대학가에서는 수많은 성희롱, 성폭력 폭로가 잇따랐는데, 당시 가장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사건 후 피해자들의 행동이 나의 기존 생각하고는 전혀 달랐다는 점”이라고 썼다. 그는 “실제로 적지 않은 피해자들이 통념과 달리, 예컨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한다”며 “피해자가 통념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은 성폭행 사건에서 증거가 될 수 없는데도 법원은 피해자가 ‘피해자답게’ 행동하지 않았음을 중요한 근거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숱한 성폭력 피해자들을 만나는 활동가들의 반응도 마찬가지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사람들이 보통 피해자라고 하면 울거나, 자기 말을 못하거나, 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실제 피해자 모습은 너무 다양하다”며 “당당한 태도로 사후 일상과 수사에 임하면 수사관들이 ‘이런 피해자는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며 의심하는 전형적 2차 가해도 흔하다”고 말했다.


 “은장도가 아니면 꽃뱀이냐” 

각급 수사기관, 법원에서 요구해 온 ‘피해자다움’에 대한 반감이 이번 판결을 계기로 격화하고 있는 셈이다. 역시 집회 참가를 계획 중인 한 30대 여성 직장인은 “판결문을 다 보진 못했으니 법원이 나름의 법리와 증거 판단을 했으리란 생각을 하면서도 주변에서는 사망에 이른 피해자만 정말 억울함을 인정받고 검증에 통과한다는 ‘은장도 망령’이란 자조적 표현까지 나오는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이들이 한 목소리로 지적하는 것은 “몸져눕고 정신을 잃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다는 증거를 입증 못 하면 진정한 성폭력 피해자로 자격을 의심받지만, 그런데도 진술에 신빙성, 일관성은 있어야 한다는 모순된 태도가 향후 많은 피해자들의 입을 닫게 할 것”이라는 우려이다.

다른 30대 전문직 여성은 “확실히 느낀 것 하나는 앞으로는 어떤 피해를 당하면 무조건 거절의 증거를 말로 하지도 말고 문자메시지로 남기고 적어도 한 대쯤은 맞아야 하고, 당한 직후에 휴가라도 하루 내고 성폭력 상담센터나 정신과를 찾아 기록을 남기고 동료를 붙들고 울어야 하겠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사법부가 제시하는 피해자다움에 대한 분노가 이렇게 큰 데도 배우자조차 판결 관련 기사를 보고 ‘피해자 행동이 좀 이상한 것 아니냐’고 말하는 것을 보고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 생각이 바로 집회 참가 결심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미투가 폭로로만 끝나지 않기 위해서, 미투 폭로에 나서는 사람들이 모두 꽃뱀 취급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진짜 피부에 와 닿는 인식의 변화, 제도 변화가 간절합니다.”

여성학자인 권김현영 한국여성단체연합 정책위원은 “일하는 여성들이 안 전지사 판결에 특히 분노하고 있는 것은 위력간음죄의 피해 상황에 대응하는 피해자 자세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과 재판부의 인식에 얼마나 큰 괴리가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며 “시민사회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이후 재판과 피해자들이 줄줄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라고 했다.

“당장 이번 사건을 두고 공개적 장소에서 ‘동백꽃’을 운운하며 불륜으로 묘사했다가 법정에 가있는 2차 가해자들이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거봐라 내 말 맞지. 불륜이지?’하겠죠. 사랑의 감정이 있었다는 증명이 어디서도 이뤄지지 않았는데도, 피해자가 울고불고 하지 않았으니 수상하다? 분노 안 하게 생겼습니까.”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박소영 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송은미 기자 mys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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