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 전체에 성추행 사과 공개 서한
“구체적 대책 없다” 여론은 싸늘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계 전역에서 고구마줄기처럼 터져 나오는 사제들의 아동 성 학대 문제와 관련해 가톨릭 교회 전체의 자성을 촉구하는 공개 서한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최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가톨릭 사제들의 집단 아동 성추행 사건 공개 이후 교황청 차원에서 성명을 냈지만, 성난 여론이 사그라지지 않자 직접 사과에 나선 것이다. 교황이 추기경들에게 서한을 발송한 적은 있지만, 12억 가톨릭 신자 전체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반응은 여전히 싸늘하다. 더 이상 말이 아닌 구체적 행동을 보이라는 주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일(현지시간) 발표한 서한에서 사제 개인들의 일탈 행위와 함께 이를 은폐한 교회 조직에 대해 강도 높게 성토했다. 그는 ‘한 사람이 고통에 처하면, 모두가 고통을 겪게 된다’는 성경 구절을 인용, “가톨릭 교회가 성 학대 피해자들의 고통을 무시하고 외면했으며, 결국 그들을 저버렸다”고 사죄를 구했다. 그러면서 은폐에 가담한 관련자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교회 내부에선 시기와 내용 모두 진정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먼저 뒷북 대응이란 지적이다. 당장 펜실베이니아주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 보고서가 공개된 것은 지난 14일. 교황청은 침묵하다 이틀이 지나서야 성명을 냈지만, 교황의 발언은 담기지 않았다. 19일 바티칸에서 열린 공개 예배에서도 교황은 이에 대해 언급조차 않았다.
미국 CNN은 25일부터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열리는 가톨릭 신자들의 최대 행사인 ‘세계가정대회’ 방문을 앞두고 교황이 여론 압박에 밀려 부랴부랴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고 지적했다. 사제들의 아동 성추문 사태가 자신의 리더십 논란으로 이어지자 책임을 피하기 위해 긴급 진화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교황이 성직자들의 조직적 은폐를 문제 삼았지만, 사후 대응 조치에선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왔다. 영국 가디언은 사설에서 “교황의 편지는 후회와 분노로 가득 찼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도를 넘어서는 구체적인 대책이 없다”고 꼬집었다. 이어 “(공개 서한은) 끔찍할 정도로 늦었고, 판에 박힌 식상한 문구들로만 채워져 있다”고도 했다. 늘 반복해왔던 유감 표명의 재탕이란 얘기다.
가톨릭 교회 내부에선 가해자들에 대한 공소시효 폐지에 교황청이 앞장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가톨릭 교구들은 아동 성범죄와 관련해 공소시효를 연장하려는 움직임을 저지하고자 로비를 일삼고,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주는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다”며 “교회의 조직적 저항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지 관건이다”고 지적했다. 교황이 아동 성 학대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만든 교황청 아동보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다 지난해 3월 사퇴한 마리 콜린스는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교황의 말을 뒷받침할 행동이 나와 주길 기대한다”고 잘라 말했다.
교황은 세계가정대회에서 성 학대 피해자들과 따로 만날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서 얼마나 구체적인 내부 개혁 조치를 내놓는지가 가톨릭 교회의 아동 성 학대 파문을 해결할 분기점이 될 것이란 관측이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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