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고의 무더위를 기록했던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제주의 여름 풍경을 꼽으라면 사람마다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밤바다를 밝히는 낚싯배 불빛과 함께 농가 마당의 빨랫줄에 갈옷을 널어 말리는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한치와 갈치잡이 낚시의 경우 어황에 따라 시기가 유동적이지만, 갈옷 말리기는 태양이 강하게 내리쬘 때만 가능하기에 한여름의 대표적인 풍경이라 할 수 있다.
갈옷은 떫은 풋감 즙으로 염색한 옷을 말한다. 제주도민들에게 갈옷은 노동복이자 일상복의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밭일을 해야 하는 농부들, 가시덤불을 헤치며 가축을 돌보는 일을 하는 테우리들, 바다에서 작업을 하는 어부들에게 갈옷은 최고의 노동복이다. 제주의 서민층이 주로 농업, 어업, 목축업에 종사했음을 감안하면 모든 계층에서 즐겨 입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갈옷은 통기성이 좋고 풀을 먹인 새 옷처럼 촉감도 좋아 시원한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땀이 차거나 물에 젖어도 몸에 달라붙지 않는다. 가시덤불에도 잘 찢어지지 않고 보리 지푸라기 등이 쉽게 달라붙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때도 덜 탄다. 설사 더러워졌다 하더라도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이처럼 노동복으로는 최상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어 제주 사람들에게 오랜 세월 실용적인 옷으로 사랑받아 왔다. 갈옷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즐겨 입었는데, 남자가 입는 옷은 갈적삼과 갈중이라 하고, 여자 옷은 갈적삼과 갈굴중이라 구분하여 부른다. 여성들의 경우는 훗날 몸빼 바지에 감물을 들여 입기도 했다. 통으로 제작돼 쉽게 입을 수 있는 몸빼의 장점을 극대화한 것이다.
감물 염색은 옷을 제작한 후에 염색하는 방법과 원단에 직접 염색하는 방법이 있다. 예전에는 옷을 만든 후에 염색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감물이 골고루 스며드는데 어려움이 있어 요즘에는 원단에 염색한 후 옷을 제작하는 추세다. 과거에는 주로 무명천을 사용했다가 1940년대 이후 광목으로 대체됐다는 것도 달라진 점이다. 부녀회를 중심으로 마을 단위로 만드는 것을 넘어 최근에는 기업화하는 경향까지 보이고 있다.
감물 들이는 시기는 풋감의 즙이 가장 많을 뿐만 아니라 햇볕이 강렬한 음력 6~7월이 좋다. 염색 과정을 간략히 소개하면, 우선 큰 대야처럼 생긴 남도구리나 절구통에서 단단한 통나무를 2등분한 후 손잡이를 깎는 도구인 덩드렁막개를 사용해 감을 잘게 부순다. 그런 다음 으깬 감을 천 사이에 균일하게 놓고, 천을 말아서 주무르거나 덩드렁막개로 두드려 감물이 잘 스며들도록 한다. 감물이 완전히 스며들면 천에서 감 찌꺼기를 제거한 후 바람이 잘 통하고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널어 말린다. 1차 염색한 갈천은 물을 축여 가면서 10회 정도 말리면 차차 붉은 황토 빛으로 짙어지고, 옷감도 빳빳해진다. 그러나 흐린 날씨에 말리면 색이 곱지 않고 풀이 죽을 뿐 아니라 곰팡이가 생길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예전에는 모두가 남도구리 또는 절구통에서 덩드렁막개를 사용해 감을 으깼으나 요즘에는 전동 분쇄기나 믹서기 등으로 쉽게 풋감을 갈아 쓰고 있다. 이렇게 으깬 풋감의 즙은 바로 사용하지 않고 저온 저장이나 냉동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염색하기도 한다. 원액과 물의 농도에 따라 다양한 갈색 계통의 색상을 얻을 수도 있다.
이러한 노력과 정성이 들어간 갈옷은 오늘날에 이르러 자외선 차단 효과 및 항균 효과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중금속 함량이 검출되지 않는 소재로 입증되면서 웰빙 상품으로 거듭나고 있다. 과거 노동복에 머물렀던 갈옷이 요즘에는 개량 한복, 침구, 커튼, 소품 등 관광 상품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하면서 제주를 대표하는 상품으로 위상이 높아진 것이다. 제주 선인들이 자연에서 얻은 지혜가 과학적으로 우수성을 인정받은 사례다.
강정효 ㈔제주민예총 이사장 hallasan195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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