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온 지구를 달군 올여름, 이색적인 뉴스가 눈에 띈다. 마땅히 갈 곳 없는 노인들이 더위를 피해 찾는 곳은 바로 인천국제공항이다. 냉방이 잘 되니 시원하고 사람 구경하기에 안성맞춤이니 심심하지 않아서 좋다고 말이다. 당장 떠날 수는 없지만 해외로 오가는 여행자들을 보며 그저 대리만족이라도 한다고.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도시락까지 싸 와서 허기를 때우는 노인들의 모습이 못내 안쓰럽다. 노령화 사회의 쓸쓸한 풍경이라지만 장유유서가 기세등등하던 옛 시절에는 노년의 삶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까?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매서운 겨울날, 이경전 할아버지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노량진 강가의 집에서 혼자 무료하게 포구 풍경만을 벗 삼아 지내고 있었다. 겨울이지만 강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들이 할아버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비록 높은 벼슬을 지내고 학식이 높은 할아버지였지만 홀로 쓸쓸히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결국 ‘마음의 병’을 얻게 된다. 고독은 할아버지의 마음속을 조금씩 허물어 내고 있었다.
몇 날 며칠 내린 눈에 세상이 하얗게 덮여버린 날, 선물처럼 할아버지에게 가장 아름다운 날이 찾아왔다.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멀리서 친구들이 찾아와준 것이다. 탁주와 김치뿐인 초라한 대접일지라도 친구들과 더 없이 좋은 시간을 보낸다. 아쉬운 마음으로 배웅을 나간 할아버지는 마침 썰매를 끌고 오는 옆집 소년들을 만나게 된다. 할아버지와 친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소년들이 끌어 주는 썰매에 올라 탄다. 한 겨울밤 꽁꽁 언 한강 위로 썰매 레이싱이 시작된다. 할아버지의 입에서는 절로 시구가 술술 흘러나왔다. 예순다섯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겨울밤이 펼쳐진다.
‘힐링 썰매’는 한 장면 안에 글과 그림이 들어가는 일반적인 그림책의 형식과 달리, 한 펼침 면씩 번갈아 가며 글과 그림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문학과 미술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마치 산과 강처럼 각자의 형상과 흐름을 존중해 주는 모습이다. 특히 화가 김세현의 절제된 필력으로 돋보이는 옛 한강의 겨울 풍경은 더위에 지친 독자의 눈을 눈 덮인 설원 속으로 인도한다. 푸른 달빛아래 얼어붙은 강 위를 달리는 네 노인과 네 소년들의 뜨거운 입김이 아름다운 진경산수 속으로 숨 가쁘게 달려간다. 어느새 나이를 잊고 볼이 언 천진난만한 아이가 되어서 책 밖으로 빠져 나온다. 고독과 우울, 권태는 눈 녹듯 사라져 있다.
힐링 썰매
조은 글ㆍ김세현 그림
문학과 지성사 발행ㆍ84쪽ㆍ1만5,000원
사백 년의 시공을 넘어 네 노인들의 유쾌한 웃음소리에 절로 기분이 상쾌해진다. 머리와 옷자락 여기저기에 눈가루가 달라붙어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젊은 날의 부귀영화가 다 무엇이랴. 도시락을 싸서 반가운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자. 공항이라도 좋고 쇼핑몰이면 어떠하리. 함께 웃고 떠들다 보면 힘겨웠던 지난 기억들도 눈송이처럼 가볍게 빛날 테니. 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소윤경 그림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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