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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입력
2018.08.26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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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현대 민법의 기반이 되는 로마의 격언이다. 제국 건설기의 로마는 매일 전쟁을 치렀다. 시민의 권리는 병역의무를 전제로 했다. 수년간 전쟁에 나가는 가장은 재산 관리를 믿을만한 사람에게 부탁했다. 부탁을 받은 사람이 약속을 어기고 재산을 빼돌리는 일 등은 엄격한 제재를 받았다.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전장에서 돌아왔을 때 재산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지켜져야 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을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조기 정년에 노후 보장이 미흡한 현실에서 연금은 생명줄과 같기 때문이다. 핵심은 준다는 약속을 지키라는 것이다. 다른 것보다 연금에서 신뢰가 중요한 이유는 낸 시점과 받는 시점 간 시차가 크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의 신뢰는 출발부터 취약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전두환 정부 시절, 최초 보험료율은 3%에 불과했지만 소득대체율은 70%에 이르렀다. 정권의 약한 정통성 보완, 국민연금 가입 유인 등의 이유가 제시되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잘못된 설계였다. 이후 역대 정부들 역시 다양한 형태로 연금을 흔들어 놓았다. 정치적 목적이 의심되는 기금의 이용도 빈번했다. 이명박 정부 때는 4대강 사업에 참여한 건설사의 채권을 국민연금이 매입했으며, 박근혜 정부 때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국민연금이 동원돼 3,000여억원의 손실이 발생한 것도 그 예이다. 기금운용의 독립성이 신뢰문제의 핵심 과제 중 하나인 이유다.

기금운용의 전문성에 대한 의심도 있다. 낮은 수익률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찬반이 엇갈린다. 적극적 투자를 하면 수익률은 높겠지만, 위험성 역시 높아진다. 미국 최대의 연금인 캘퍼스가 지난 수년간 공격적 투자에 나섰다가 대규모 손실을 본 것이 그 예다. 따라서 전문성이 영향을 주겠지만, 낮은 수익률의 원인을 전문성 부재로 바로 연결시키기는 어렵다.

보험료를 인상하고 소득대체율을 바꾸겠다는 것은 결이 다른 문제다. 예측보다 노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반면, 출산율 하락 역시 가파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5년 주기로 돌아오는 이번 종합계획 수립 과정에서 다시 들여다보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상황변화에 따른 최적의 선택과 이를 뒷받침할 사회적 합의를 어떻게 이끌어내느냐이다. 그 전제로서 국민연금을 둘러싼 다양한 주장들의 진위도 가려야 하며, 보험료 인상 시 감당해야 할 각 당사자들의 부담도 밝혀야 한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변화에 대한 신뢰를 형성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신뢰부재가 지급불능에 대한 불안감이다. 그러다보니 갈라진 신뢰를 메우는 방법으로 법에 지급보증을 명문화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만약 국민연금이 지급능력을 상실한 경우라면,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어차피 재정으로 지급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지급보증을 명문화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리라고 보지는 않는다.

신뢰문제의 마지막은 미래세대가 현재 세대에 기대하는 신뢰다. 국민연금제도개선위원회가 제시한 안에 따르면 가장 큰 부담을 져야 하는 세대는 현재의 청장년도 아닌, 어린 아이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다. 이는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맹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투표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혜택이 집중되며, 미래세대에 대한 배려는 소홀하기 때문이다. 적게 내면서 많이 받는 구조를 고치는 대원칙을 합의로 도출해야 하는 이유이다.

국민연금으로 얼마를 내고 어느 정도를 받을 것인가는 노령화와 출산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꼭 연금정책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정책적 보완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러나 지지층을 의식한 정치적 의도를 배제하고, 세대간 균형부담을 고려한 정책 선택과정을 거친다는 약속은 어떠한 경우에도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신뢰를 쌓는 곳은 결과가 아니라, 바로 그 과정이기 때문이다.

최승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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