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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인과 의사들 “낙태 원하는 여성 ‘살려 달라’ 호소 외면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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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인과 의사들 “낙태 원하는 여성 ‘살려 달라’ 호소 외면 못해”

입력
2018.08.30 04:40
수정
2018.08.30 10:11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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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여성 125명이 경구용 자연유산 유도약인 '미프진'을 복용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26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여성 125명이 경구용 자연유산 유도약인 '미프진'을 복용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원장님 부탁입니다. 딸 둘 키우는 것도 힘들어 죽을 판인데 셋째는 도저히 낳을 수 없습니다. 아이를 지워주세요. 저 좀 살려주세요.”

서울 강북지역에서 30년 넘게 산부인과를 운영하고 있는 산부인과 전문의 A원장은 최근 김주영(47ㆍ가명)씨의 간곡한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10년 전 이 병원에서 둘째를 낳은 뒤 의도치 않게 생긴 셋째. 김씨는 3년 전 남편이 실직한 후 동네 김밥전문점에서 일하며 어렵게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단지 경제적인 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A원장은 “3년 뒤면 나이 오십이 되는 김씨의 신체상황을 볼 때 출산을 할 경우 부작용도 적지 않아 보였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래도 생명은 소중하니 출산을 해야 합니다”라는 말은 김씨에게는 너무 가혹한 것이었다. 낙태 수술이 결정된 후, 김씨는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원장님이 우리 가족을 살린 겁니다. 여유만 있으면 제가 왜 이런 일을 하겠어요. 저도 엄마이고, 여자인데…” A원장은 29일 “이럴 때면 산부인과 의사를 왜 했나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든다”고 했다.

최근 대한산부인과의사회 소속 산부인과 전문의들이 인공임신중절(낙태) 수술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17일 ‘의료관계행정처분규칙’을 개정, 형법 제270조를 위반해 낙태시술을 한 의료인에 대해 자격정지 1개월에 처하기로 한 방침에 반발해서다. 이번 산부인과 전문의들의 낙태수술 전면중단 선언은 보건당국이 낙태에 대한 현실을 무시한 채 모든 책임을 의사들에게 전가시켰다는 분노가 저변에 깔려 있다. 산부인과 전문의들은 낙태는 형법으로 금지돼 있지만 법을 떠나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외면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라고 강변한다.

낙태죄 폐지에 대한 의견_김경진기자
낙태죄 폐지에 대한 의견_김경진기자

 ◆미성년자가 와서 인생이 달렸다는데… 

미성년자가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해 낙태수술을 원할 경우가 가장 곤혹스럽다고 산부인과 전문의들은 말한다. 서울 강북지역 한 산부인과 클리닉에서 근무하고 있는 산부인과 전문의 B씨는 “10대 여자아이가 임신을 했다며 아이를 지워달라고 할 때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다”고 했다. 한번은 낙태는 불법이라서 해 줄 수 없다고 하자 다음 날 그 여자아이의 엄마가 병원에 찾아와 “선생님 딸이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느냐. 딸 아이의 인생이 달린 일이니 한번만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결국 이를 외면하지 못하고 낙태수술을 했다고 전했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경제적인, 또 환경적인 이유로 낙태를 결심하는 경우가 많다. 올 5월 둘째를 임신한 30대 중반 맞벌이 부부는 B씨를 찾아갔다. 아이를 낳아도 맡길 곳도 없고 출산으로 인한 경력단절을 원하지 않는다며 1시간 넘게 진료실에서 나가지 않고 버텼다고 한다. B씨는 “아이 하나 키우기도 힘든 사회 환경이 낙태를 조장하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라고 말했다.

불륜으로 인한 임신으로 낙태를 원하는 경우 의사들 역시 곤혹스럽다. 서울 강남의 산부인과 클리닉에서 근무하고 있는 산부인과 전문의 C씨는 “30~40대 유부녀 중 불륜으로 임신을 해 병원을 찾아와 울고 불며 낙태를 해달라고 매달리는 이들이 많다”며 “이번 달에 벌써 3건이나 낙태수술을 했다”고 털어놨다.

모자보건법 낙태수술 허용 범위_김경진기자
모자보건법 낙태수술 허용 범위_김경진기자

 ◆의사도 수술하고 괴롭다 

물론 낙태 수술을 하는 산부인과 의사들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이 고울 수만은 없다. “결국 돈을 벌기 위해 낙태에 집착하는 것 아니냐”며 돌을 던지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억울함을 항변한다. 일부 몰지각한 산부인과 전문의들이 낙태수술로 돈을 벌지 몰라도 대부분의 산부인과 전문의들은 환자의 딱한 사정을 외면할 수 없어 낙태수술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실제 그들 역시 생명을 사라지게 하는 데 대한 번뇌가 없지 않다. 경기 일산 산부인과 D전문의는 “임신 1, 2주에 낙태 수술을 하면 그나마 간단하지만 9주 이상 되면 태아가 손가락, 발가락까지 있는 상태라 괴롭고 힘들 수밖에 없다”며 “수술 후 자궁에 남아있는 수태물을 긁어내면서 울컥할 때가 많다”고 전했다. 그는 낙태수술을 한 날은 늦은 밤까지 잔상이 남아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D전문의는 “법대로 낙태를 하지 않으면 의사도 편하다”며 “지금도 인터넷에서 성분이 불분명한 중국산 낙태약을 먹고 하혈로 응급실에 실려 오는 여성들이 많은데 산부인과 전문의들이 낙태수술을 전면 거부하면 환자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우려 된다”고 말했다.

 ◆“모자보건법 개정해야 불법 수술 감소” 

산부인과 전문의들은 모자보건법에서 규정한 낙태수술의 허용한계를 현실적으로 개정해야 불법 낙태수술이 감소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행 모자보건법에서는 우생학적, 유전학적으로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거나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등에 한해 낙태수술을 허용하고 있다. 김탁 고려대안암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미성년자나 사회・경제적으로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없는 이들에 한해 임신 초기에 중절수술을 할 수 있게 하는 등 사실상 사문화된 모자보건법을 현실에 맞게 개정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치중 기자 cj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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