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이번에 합의한 철도연결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경원선(서울-원산, 224㎞)은 경의선 못지않게 중요하다. 일제가 부설한 경원선은 서울에서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 중앙선과 접속하여 한반도 중앙을 비스듬히 횡단함으로써 남북 종단에 편중된 교통체계를 대폭 보완한다. 또 선진지역인 서울과 경기도, 자원보고인 강원도와 함경도를 이음으로써 경제발전과 국방강화를 촉진한다. 나아가 경원선은 함경선, 도문선을 경유하여 만주 연해주로 직통하여 동북아 간선을 형성한다. 경원선에서 분기한 금강산전기철도, 동해선, 경춘선은 관광과 자원을 개발한다.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은 1890년대 경원선의 탁월한 가치를 주목하고 한국정부에 부설권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열강의 압박에 시달린 한국정부는 경원선을 자력으로 건설하겠다는 방침을 천명하고, 1899년 6월 17일 박기종 등이 설립한 대한국내철도용달회사에 부설권을 내주었다. 이 회사는 다음 달 서울 동소문 밖 삼선동을 기점으로 양주군 비우점까지 40㎞를 측량했다. 한국정부도 궁내부 내장원에 서북철도국을 설치하고 경원선 건설을 감독했다. 그렇지만 이 회사는 자본조달이 여의치 않아 공사를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골몰하던 일본은 이 틈을 노려 경원선 이권을 장악했다. 일본은 1903년 9월 이 회사와 차관계약을 체결하고 사채를 제공하는 대신 부설권과 운영권을 차지했다. 일본은 곧 러시아와 전쟁에 돌입하면서 이 계약조차 무시하고 1904년 8월 경원선을 군용철도로 부설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임시군용철도감부 아래 원산철도건축반을 꾸려 1905년 5월까지 노선측량을 모두 마쳤다. 아울러 노반공사에 착수하여 1905년 4월까지 원산 방면 13㎞, 1905년 9월까지 용산 방면 6㎞를 완성했다. 일본은 예상보다 일찍 승리하자 공사를 일단 중지했다.
일본은 한국강점을 전후하여 지배력을 사방으로 확산하기 위해 경원선 부설을 다시 추진하고, 1910년 4월 노선선정, 10월 부설공사를 재개했다. 이에 따라 토지와 노동력을 헐값에 빼앗긴 연선 주민은 눈물겹게 저항하고, 의병은 공사현장을 습격했다. 일본인은 흰옷을 입어 한국인으로 위장하고, 무장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공사를 강행하여, 1914년 8월 경원선을 완공했다.
서해와 동해를 연결하는 경원선은 동북해안을 북상하여 만주와 연해주로 뻗어간다. 급행열차가 서울-원산-청진-남양-나진을 달렸다. 1940년 10월 1일부터 서울-목단강(牧丹江)에도 직통 국제열차가 운행되었다. 목단강은 시베리아철도 만주관통선과 도가선(圖們-佳木斯)이 교차하는 군사도시로서 한반도와 유라시아대륙을 이어주는 결절지점이었다. 서울에서 경원선, 함경선, 도가선을 타고 27시간가량 달리면 목단강에 이르고, 이곳에서 열차를 갈아타면 유라시아 주요 도시에 갈 수 있었다.
경원선은 사람, 물자, 정보 수송에서 경의선 버금의 역할을 했다. 아울러 연선의 금강산, 석왕사, 삼방산, 명사십리 등을 관광과 스포츠, 휴양의 명소로 만들었다. 일제는 전쟁말기 경원선 수송력을 강화하기 위해 복선을 깔고 신고산 일대에서 전기기관차를 운용했다. 이에 수탈은 더욱 가중되어, 한국인은 ‘신고산이 우르르 화물차 가는 소리에’ ‘지원병 보낸 어머니 가슴만 쥐어뜯고’ ‘양곡배급 적어서 콩깻묵만 먹으며’ ‘정신대 보낸 어머니 딸이 가엾어 우는’(신고산타령) 처지로 내몰렸다.
해방 후 남북분단으로 경원선은 허리가 잘렸다. 6ㆍ25전쟁 때 경원선 연선 ‘철의 삼각지’에서는 최악의 격전이 벌어졌다. 이후 신탄리(남)-평강(북) 31㎞는 폐선 상태가 되었다. 남한은 용산-신탄리 구간을 현대화했다. 북한은 평강-함경선 고원 구간을 강원선(145.1㎞)으로 개편하고 전기화했으나 잦은 정전으로 반신불수다. 북한은 횡단노선으로서 강원선 세포-경의선 평산 사이에 청년이천선(140.9㎞)을 신설했다.
경원선은 태어날 때부터 국제적, 군사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따라서 남북이 경원선을 연결하려면 먼저 국제적 효용성을 극대화하고 군사적 위험성을 극소화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위장평화의 꼼수를 쓴다거나 백일몽식의 청사진을 남발해서는 안 된다. 특히 북한의 핵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남한은 무엇보다도 국가안보와 국민생활을 보장하는 방책을 치밀하게 강구하는 게 급선무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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