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가 ‘숙적’ 일본을 꺾고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하기까지 선수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한 김학범 감독의 결정적인 한마디가 있었다.
김학범 감독이 이끄는 한국 23세 이하(U-23) 대표팀은 지난 1일 (한국시간) 일본과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결승전에서 전ㆍ후반 90분 동안 0-0으로 비겼다. 연장전을 앞두고 김 감독은 선수들을 불러 모아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고 한국은 연장 전반 이승우(베로나), 황희찬(함부르크)의 릴레이 골이 터지며 2-1로 승리했다.
3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선수단과 함께 들어온 김 감독은 “연장전을 앞두고 무슨 이야기를 나눴느냐”는 질문에 “특별한 이야기는 안 하고, 하나만 했다”며 이같이 답했다.
“일장기가 우리 태극기 위에 올라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나는 두 눈 뜨고 그것은 못 본다. 태극기가 위에 있어야 한다.”
이번 아시안게임 우승은 여러 측면에서 2012년 런던올림픽 3,4위전을 떠올리게 한다.
6년 전에도 한국은 동메달을 놓고 일본과 맞붙었고 박주영(서울), 구자철(아우크스부르크)의 연속 골에 힘입어 2-0으로 승리하며 한국 축구 최초 올림픽 메달 획득이라는 역사를 썼다. 당시 사령탑이었던 홍명보 감독은 한일전 전날 비디오 미팅을 할 때 양 팀 선수가 동시에 점프하는 장면에서 화면을 정지시켰다. 전술적으로는 특별히 설명할 게 없는 부분이었지만 홍 감독의 한 마디는 선수들의 전의를 불태웠다.
“내일 저런 상황이 되면 너희들은 갖다 부숴버려!”
한일전에서는 기술과 체력보다 정신력과 기개가 더 중요하다는 걸 두 사령탑 모두 알고 있었고 적재적소에 활용한 것이다.
한국 축구에서 소위 ‘비주류’로 분류되던 김 감독은 이번 아시안게임 우승으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전례 없는 대회 2연패 도전, 손흥민(토트넘)의 병역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라 부담이 컸지만 보란 듯 이겨냈다. 대회 전 황의조(감바 오사카)를 뽑으며 ‘인맥 논란’이 불거졌지만 황의조는 두 차례나 해트트릭을 달성하는 등 9골로 득점왕에 오르며 비판을 깔끔하게 잠재웠다.
김 감독은 “우승하니까 좋다. 선수들이 열심히 해줘서 좋은 성적, 좋은 결과 가져온 것 같다. 모든 축구팬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선수, 팬에게 공을 돌렸다. 이어 이번 아시안게임에 와일드카드(23세 초과)로 참가한 손흥민과 황의조, 조현우(대구)에게 “3명이 이번만큼 고생한 대회가 없을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 제 몫 이상으로 2~3명의 역할을 했다. 선배로서 후배들을 잘 이끌어줬다”고 고마워했다.
2020년 도쿄 올림픽 구상에 대해 그는 “아직 그것까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우리 선수들이 여기서 만족하지 말고 소속팀으로 돌아가 K리그 붐을 일으키고 좋은 경기로 팬들이 축구장을 찾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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