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 정책 수립 위한 통계
성별ㆍ역할 등 의식변화 반영 없이
가부장적 용어ㆍ문항 등 여전
여성들 조사 거부 움직임에
보사연 “다음 조사 때 반영될수도”
“여성은 출산 기계가 아니다. 출산력 조사를 당장 중단하라.”
“임신과 출산은 여성 자신이 선택할 문제로, 국가가 강요할 수 없다.”
인구 실태 파악과 보건ㆍ복지 정책 수립을 위한 국가 통계조사인 ‘전국 출산력 및 가족보건 복지 실태조사’가 시작된 지 반 세기 만에 조사 대상인 여성들의 강한 반발에 직면했다. ‘출산력’이라는 단어에서부터 여성을 출산 도구로 보고 국가가 여성의 신체를 통제하려는 시각이 드러나는 데다 가부장적 가치관이 드러나는 문항이 적지 않다고 이들은 지적한다.
3일 보건복지부 등에 따르면 국책연구기관인 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은 인구정책이나 보건ㆍ복지 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어 꼭 필요한 기초 통계수치를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1968년부터 50년 간 3년 단위로 출산력 조사를 해오고 있다. 지난 7월부터 다음달 3일까지 출산력 조사를 진행 중인 보사연의 이소영 인구정책연구실 연구위원은 “출생 통계는 국가 운영에 꼭 필요한 거시 지표로서, 모유 수유율, 난임 관련 통계, 이상자녀 수, 영아 사망률, 피임 실천율 등 이 조사에서만 확보할 수 있는 수치들이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50년 가까이 진행되는 동안 사회적으로 크게 바뀐 성별 역할 인식 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사연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이 조사를 비판하는 내용의 게시글이 불과 나흘 만에 600건이 넘게 올랐다. 김모씨는 이날 올린 게시글에서 “현관문에 ‘전국 출산력 조사 대상자’라며 연락을 달라는 메모를 붙여 놓았더라”며 “여성이 거주하는 집이라는 것이 알려져 범죄에 노출될 수 있는 건 물론, 여성을 사람이 아닌 가축과 비슷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아니냐”고 격분했다. 박모씨는 “임신 과정은 여성 혼자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며 “왜 한국 남자들의 정자는 건강한지, 어느 지역에 건강한 정자를 가진 남자가 많은지 등에 대한 조사는 없나”라고 꼬집었다. 출산력이라는 단어 자체가 여성을 출산 도구로 여기는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실제 2015년 조사 당시에도 일부 자문위원이 ‘출산력’이라는 단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일부 설문 문항도 가부장적 내용이 전혀 바뀌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가족 내 부부의 역할에 대해 묻는 5번 질문. 여기에 포함된 네 가지 문항은 ‘아내는 남편이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남편이 할 일은 돈을 버는 것이고 아내가 할 일은 가정과 가족을 돌보는 것’ 등 과거의 남성 우월적 가치관을 반영하는 내용이다. 때문에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출산력 조사원 방문 시 조사를 거부하자는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보사연 측은 일부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조사 방식에 큰 문제는 없다는 입장이다. 이 연구위원은 “출산력이라는 용어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fertility’라는 영어 단어의 번역어일 뿐이며 변화한 가치관을 반영한 질문 문항도 일부 있다”며 “3년 후에 있을 차기 조사에서는 이번 비판을 수용해 어느 정도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최진주기자 parisc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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