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9월 13일 오전 백악관 남쪽 잔디밭. 3,000여명의 각국 인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자치기구(PLO) 의장이 빌 클린턴 대통령 앞에서 손을 맞잡았다. 자국 대표들이‘잠정적 자치에 관한 여러 원칙에 관한 선언’에 서명한 직후다. 불과 몇년 전까지도 “이스라엘을 지중해 바다 속으로 쓸어 넣겠다”던 PLO와 “팔레스타인은 ‘약속의 땅’에 발도 못 붙이게 하겠다”던 이스라엘은 이 선언으로 이스라엘이 건국한 지 45년 만에 처음으로 상대를 정치적 실체로 인정하게 됐다.
그해 초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시작돼 약 8개월여에 이어진 비밀협상의 결과물인‘오슬로 협정’이행을 확약하는 이 선언은 2개월 내 이스라엘군이 요르단강 서안 예리코와 가자지구에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 지역의 자치를 맡기기로 한 것이 골자였다. 비록 예루살렘의 장래 지위, 1948년 이후 쫓겨난 팔레스타인인 난민의 권리 등 주요 쟁점들이 후속 회담으로 미뤄졌지만 반세기 가까이 이어졌던 양 측의 유혈충돌의 역사를 떠올리면‘평화와 영토의 맞교환(land for peace)’ 원칙하에 이뤄진 이 합의는 천지개벽과 같았다. 이 선언의 주역인 라빈 총리, 아라파트 의장,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장관 3명은 이듬해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역사적 합의였음은 분명하지만 불행히도 이-팔 관계는 이후 획기적으로 전환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양 진영에는 협정을 파기하려는 극단주의 세력이 힘을 얻었다. 이스라엘에서는 극우 청년에 의한 라빈 총리의 암살(1995년)과 우익연합의 정권 장악, 팔레스타인에서는 협정 파기를 목표로 이스라엘과 자치정부 양쪽에 테러를 가하는 하마스의 득세로 이어졌다.
오슬로 협정이 제시한 평화프로세스는 이후 하마스의 반발과 이스라엘군의 서안지구 재점령 등으로 빛이 바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오슬로 협정을 통해 이-팔 분쟁에 대한 국제사회의 처리 원칙인 ‘두 국가 해법’이 확립됐다는 점이다. 이는 팔레스타인이 주권국가로 독립해 이스라엘과 국가 대 국가로 공존하도록 하자는 원칙이다.
취임 첫 해에 오슬로 협정이라는 망외의 외교적 성과를 수확하며 자신감을 얻은 클린턴 행정부 이후 20여년간 미국은 이-팔 분쟁 해결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지만, 양 진영의 평화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런 가운데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다는 폭발력 높은 문제를 건드리면서 노골적 친이스라엘 편향을 드러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가 그 어느 때보다 주목되는 것이 사실이다. 팔레스타인 측은 이런 미국의 행보에 거센 반감을 드러내면서 공공연히 오슬로 협정의 사문화를 주장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으로 미국의 팔레스타인 정책이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이왕구 기자 fab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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