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위원들 “한일 관계 악영향”
‘일본군 성 노예제’ 보류 판정
문화계 블랙리스트 파문을 일으킨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의 외교 마찰을 우려해 ‘위안부 관련 학술서적’을 해외출판사업지원 리스트에서고의적으로 뺀 정황이 드러났다.
9일 국회 외교통일위 소속 이석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외교부 산하 한국국제교류재단은 2016년 11월23일 진행한 ‘2017 출판지원사업’ 심사에서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이 신청한 ‘일본군 성 노예제(Military Sexual Slavery of Imperial Japan)’를 ‘지원 보류’로 판정하고 지원 대상에서 제외했다.
출판지원사업 심사에서 보류 평가가 나온 건 이례적이다. 2014년부터 5년간 심사 대상에 오른 104종 중 보류 판정을 받은 건 해당 서적이 유일하다. 특히 해당 서적은 1차 심사에서 평가 대상 서적 15종 중 두 번째로 높은 86.67점을 받았다. 점수만 보면 배제될 이유가 전혀 없는 셈이다. 반면 이 책보다 낮은 점수를 받은 13종은 모두 지원 대상에 선정됐다.
심사위원들은 교류재단이 해당 서적을 지원할 경우 한일관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교류재단 미디어분과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A위원이 “2번(‘일본군 성 노예제’)은 전반적으로 지원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분은 없느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B위원은 “(지원하게 되면) 이 책에는 재단 로고가 박히게 되는데, 한일관계가 썩 좋은 편이 아니라서 나중에 저희가 사업을 할 때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되는 부분이 있다”며 반대 의견을 냈다. C위원은 “책과 재단의 공식적 입장이 동일시 될 수도 있다. 오인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며 가세했다. 분과위원들은 결국 해당 서적 지원을 보류로 평가하고, 교류재단이 외교부와 논의한 뒤 내부 정책에 따라 결정하라며 재단에 판단을 위임했다.
당시 심사를 맡은 교류재단 미디어분과위원은 이화여대 교수인 유세경 위원장을 비롯해 이인희 경희대 교수, 민경미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본부장, 조삼섭 숙명여대 교수, 이종혁 광운대 교수 등 5명이다. 이 가운데 유 위원장은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여론집중도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위촉됐다. 이 밖에 재단 직원 5명도 회의에 참석했다.
판단을 위임 받은 교류재단은 이후 별다른 논의나 조치를 하지 않았다. 심사 시기가 한일 위안부 합의(2015년 12월28일) 1주년을 1개월 정도 앞둔 터라, 사업취지보다정치적 판단을 앞세웠다는 게 이 의원의 주장이다. 당시 재단을 이끈 이시형 이사장은 2016년 5월에 취임했고, 박근혜 정부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표부 대사를 지냈다. 이 의원은 “위안부 문제는 적극적으로 세계에 알리고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재단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이를 보류해 사업을 진행시키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류호 기자 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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