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장 심사 전날 판사들에 이메일
“추억 삼아 갖고 나와” 억울함 토로
‘자료 없애지 않겠다’ 서약서 쓰고도
압수수색 세번 기각되는 동안 파기
영장 기각 판사는 함께 근무한 동료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농단 수사의 핵심 혐의자인 유해용(53) 변호사의 수사 방어 행태가 도마에 오르고 있다. 전ㆍ현직 판사들에게 구명 로비를 펼치는가 하면 핵심 증거물을 파기하는 등 차관급 고위법관 출신인 전관 위세를 적극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11일 한국일보 취재 결과,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 출신인 유 변호사는 지난 주말 복수의 현직 판사들에게 사법농단 수사 대상으로 떠오른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유 변호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진료’를 맡았던 김영재 원장 부인 박채윤씨의 특허소송, 통합진보당 소속 국회의원들의 지위확인 소송, 전교조ㆍ강제징용 사건 등 박근혜 청와대의 관심 사건 소송에 개입한 혐의를 받고 있다. 지난 5일 압수수색 과정에선 판결문 초고 및 대법원 재판연구관 보고서 등 대법원 기밀자료 수만 건을 무단 반출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메일에는 “법원에 근무할 때 습관처럼 작성ㆍ저장했던 자료 중 일부를 추억 삼아 가지고 나온 것”이라거나 “가지고 있던 자료 중 상당 부분은 개인의견을 담은 자료로서 공무상 비밀이나 공공기록물이라고 보기 어렵다” “연구관이 작성한 초안에 제가 의견을 추가해 기재한 것으로 미완성 상태의 문서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유 변호사가 영장 심사 전날인 9일 법원행정처 소속을 포함한 현직 판사들에게 이메일을 보냈고, 실제 이튿날 법원에서 유 변호사 이메일 내용과 유사한 사유를 들어 영장을 기각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유 변호사가 사실상 ‘구명 이메일’을 보낸 게 아니냐는 뒷말이 나온다.
유 변호사는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에 있던 문건과 컴퓨터 저장장치 등 핵심 증거물을 무단 폐기하면서 검찰마저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특허소송 문건에 대해서만 영장이 나왔던 5일 1차 압수수색에서 검찰은 대법원 기밀 문건들을 발견하고, 유 변호사로부터 자료들을 없애지 않겠다는 서약서까지 받았지만, 유 변호사가 이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유 변호사는 “관련 자료를 가지고 있으면 검찰이 끊임없이 저를 압박할 것을 예상하니 너무 스트레스가 극심해 어차피 법원에서도 범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만큼 폐기해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앞서 지난 6일 이언학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공공기록물관리법위반죄 및 형사법절차전자화촉진법위반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는 이유를 들어 2번째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했다.
일반인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유 변호사의 행태에 대해 법원 안팎에선 대법원 재판연구관들을 총괄했던 수석연구관 출신인 자신의 전관 위세를 믿고 벌인 것으로 보는 분위기다. 재판연구관을 거친 판사들은 지금 각급법원의 주요 보직을 맡고 있다. 유 변호사 영장을 기각한 박범석 부장판사도 2014년 유 변호사가 선임연구관으로 근무할 때 재판연구관으로 함께 근무했다.
안아람 기자 onesh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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