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 처벌땐 내 미래 불투명” 부조리 알면서도 침묵
10년간 인건비 상납 지친 대학원생, 2억 들고 잠적도
“졸업이라는 나의 작은 사리사욕 때문에 세상을 속였습니다. 내가 대학원에 다니지만 않았더라도 내 양심을 팔지 않았을 텐데....”
지방 모 국립대 공대 박사과정을 졸업한 조범수(가명ㆍ43)씨는 지난 5월 모교 홈페이지 학내 게시판에 응어리를 터트렸다. “나는 몰랐습니다. 대학원에 가면 그런 거짓말도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을.”
8년간 그를 괴롭힌 거짓말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그는 ‘사실만을 말하고 만일 거짓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겠다’고 법정에서 맹세까지 했지만, 졸업의 명줄을 쥐고 연구비 횡령을 지시한 지도교수를 보호하려고 진실을 가렸다고 털어놨다. 수사관과 판사에 거짓(연구비 횡령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말)을 말하고 교수를 감쌌지만, 대신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연구비 공동관리를 통한 횡령 사건을 밝히지 못하고 불의 앞에 무릎 꿇은 데 대한 자책. 게시판에서 그는 스스로 “감옥에 가야 마땅하다”고 푸념했다. 연구비 횡령을 둘러싼 조씨의 양심고백은 이내 다른 후배들의 ‘OO학과 비리사건’ 제보로 이어졌고, 대학사회의 온갖 모순을 상징하는 연구비 공동관리 시스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 됐다.
“지도교수의 말을 듣지 않으면 졸업을 하거나 박사학위를 받을 수 없는 위치였다.”
“절대적인 을(乙)의 위치에 있었다.” “’거짓말도 앞뒤가 맞아야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어떻게 하느냐’며 선배가 매우 괴로워했다.”
누군가는 관행이라 넘겼고, 어떤 이는 횡령이라며 이를 악물던 ‘연구비 공동관리’ 문제가 거듭 수사와 재판으로 이어지며 여론재판의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얼마 전 서은경 전 과학창의재단 이사장이 전북대 교수 재직 시절 연구비 유용 의혹을 받고 취임 99일 만에 사퇴해 물의를 빚는가 하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밝힌 2014년 이후 지난 7월까지 연구개발비 횡령으로 인한 피해액은 무려 124억8,000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 대책위원회는 13일 “연구비 570만원을 허위 청구하거나 제자 명의와 비용으로 부인 선불폰을 개통했다”며 이 학과 한모 교수에 대해 사기와 강요 혐의로 추가 고발장을 제출했다. 교육부는 한 교수를 지난 4월 학생인건비 1,500만원을 빼돌린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고, 학교는 정직 3개월 처분을 내렸다. 지난달 초에는 대구 모 사립대 교수가 연구비 2억여원을 빼돌리다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 형을 받는 등 연구비 횡령 실태가 뉴스의 중심에서 끊임없이 맴돌고 있다. 지난해 1월부터 12일까지 전국 법원에서 선고된 대학 연구비 횡령 관련 판결은 58건에 달하며 이 가운데 올해 들어 선고된 사건만 22건에 이를 정도다.
조씨가 허위진술을 했노라고 자백한 연구비 횡령 사건은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A교수 연구실의 인건비를 관리하던 김재원(가명)씨는 교내 현금인출기에서 여러 학부생 명의 통장에 입금된 인건비를 한꺼번에 찾다가 잠복해있던 수사관들에게 체포됐다. 잠시 뒤 지도교수인 A씨도 자신의 아파트에서 긴급체포됐다. 연구비 횡령 혐의다.
경찰과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학내에서는 ‘대책회의’가 소집됐다. 이 대책회의는 그러나 학생과 교수에게 서로 다르게 기억됐다. 학생들은 이 자리에서 교수들의 강압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대책회의는 실제 연구비 횡령 의혹 사건과 다른 사실관계를 말하도록 강요하려는 취지였다. 재판에서 A교수에게 유리한 진술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교수들은 다르게 회상했다. “많은 교수가 제소되어 해당 학과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 대책회의를 구성했다. 졸업생들이 제소된 교수들에 대한 탄원서를 준비하던 중 조씨도 탄원에 동참시키기 위해 전화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직접 방문한 것이다.”
이들은 기소유예 처분되거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에 넘겨지지 않았거나 약식재판을 받아 판결문이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수사 검사에게 설명을 들었다. 최운식 전 검사(법무법인 대륙아주 변호사)는 “공동관리한 돈을 교수가 개인적으로 쓴 게 아니라는 사실만 입증되면 공동관리한 부분은 선처를 많이 받았다”며 “그러나 사적으로 쓴 사람은 실형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조씨의 양심고백에는 자신의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순수하게만 볼 수 없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이 사건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진 대학원생들의 처우와 불합리한 관행에 경종을 울린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관행이란 이름의 범죄
사제 간 진실 공방이 벌어진 배경에는 복잡한 연구비 운영 방식이 있다. 지도교수는 외부에서 연구용역을 받아와 석ㆍ박사과정 학생들에게 과제를 나눠준다. 연구 대가로 받은 용역비용은 교수가 관리한다. 연구 참가자가 아닌 연구실 전체의 수입으로 보는 것이다. 대학원 상당수가 이런 방식으로 연구비를 ‘공동관리’한다. 흔히 ‘풀링(Pooling)’이라 부른다.
연구생들은 자신의 통장에 입금된 돈을 인출해 공동관리를 도맡는 랩장(연구실 반장)에게 전달한다. 구태여 출금을 하는 것은 통장에서 통장으로 이동하는 돈의 흐름을 숨기기 위해서다. 이 돈은 석사과정에 갓 입학해 아직 연구실적이 없는 학생들의 월급으로 지출되는 등 주로 연구실 살림에 쓰인다. 일부 학생의 노동 대가라지만 동료의 월급으로 쓰이니 이런 연구비 운영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대학원생은 그리 많지 않다. 때로는 자신도 동료의 덕을 보았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대학원생들은 “인건비 공동관리 방식은 분명 비정상적이지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그야말로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신원이 특정되면 동료들이 직ㆍ간접적 피해를 입고 학계에 남을 수 없을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다. 혹여 수사로 번져 지도교수가 징계나 처벌을 받게 되면 해당 연구실 학생 전체의 졸업 여부가 불투명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컸다. 한국일보는 취재원 보호를 위해 연구비 관련 피해를 입거나 목격한 대학원생들의 목소리를 가명으로 전하기로 했다.
자신을 08학번이라고 소개한 신영훈(가명)씨는 연구비 공동관리의 최종목적지는 교수의 주머니라고 증언했다. “연구과제에는 실제 일하는 교수님들과 석ㆍ박사과정생 외에도 일하지 않는 사람의 이름도 포함됐습니다. (과제에 이름을 올린 학생들의) 통장을 일괄적으로 모아서 연구비를 찾은 뒤 교수님께 드렸고요. 이렇게 학생들의 인건비를 횡령하는 것이 당시 우리 과에서는 흔한 일이었어요. 연구과제를 수행해 받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고 교수들에게 주는 것이지요. 대학교는 학생들의 연구와 취업을 위한 곳이 아니라 교수들이 용역을 통해 돈을 챙기는 곳이었습니다.”
연구비 공동관리는 자체로 엄연한 불법이다. 국가연구개발사업의 관리 등에 관한 규정은 학생 인건비를 연구책임자가 공동으로 관리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정하고 있다. 법원도 공동관리가 정당한지를 엄격하게 판단한다. 대구지법은 2016년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학생을 연구자 명단에 올려 인건비를 부당하게 많이 받고 이를 공동으로 관리한 국립대 교수의 해임이 정당하다고 봤다. 재판부는 “연구책임자인 교수와 학생은 특수한 관계에 있어 공동관리라는 명분 아래 교수가 인건비 처분 권한을 요구하면 학생들은 현실적으로 이를 거절할 수 없다”면서 “학생들이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고 교수들이 인건비를 개인적으로 유용하는 폐단을 방지하려는 취지의 규정”이라고 지적했다. 법원은 연구비를 받은 학생 계좌에서 교수 계좌로 직접 송금하지 않는 비정상적인 방식도 심각한 문제로 봤다. 금융거래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연구비를 한꺼번에 출금하던 김재원(가명)씨가 긴급체포된 이유다.
지난해 2월에는 실제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학생들을 연구원으로 허위 등록해 국가연구개발사업 연구비를 챙긴 국립대 교수에게 징역 1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이 교수 역시 “인건비가 네 명의 지정 계좌로 입금되면 현금으로 인출해 내게 달라”는 취지로 요구해 현금을 회수하는 전형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그가 돌려받은 돈은 1억4,500만원에 달한다.
돈이 교수의 손에 있다 보니 연구비가 부당하게 쓰인 것 아니냐는 의혹이 생기기도 하고, 직접 묻지 못해 조용히 넘어가는 일도 적지 않다고 한다. 실제 연구에 참여한 사람뿐 아니라 일하지 않은 학생들의 이름이 제출되기도 한다. 인건비를 더 받기 위해서다. 교수와 학생들은 이를 ‘관행’이라 말했다.
공동관리하는 연구비가 연구목적으로 사용되면 학생들은 그나마 수긍한다. 조씨의 모교에서는 다른 교수 3명과 관련한 연구비 횡령 의혹 사건이 또다시 불거졌다. 2007년부터 약 10년간 제자 20여명의 인건비 6억5,000만원을 돌려받아 개인용도로 사용한 혐의가 수사 결과 드러났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 중 1명은 딸의 미국 유학자금을 대기 위해 총 4억여원을 횡령했다. 다른 교수는 대학원생 명의로 매입해 기숙사로 활용하던 아파트를 아들 명의로 변경하며 5,000만여원을 횡령했다. 연구비 공동관리에 대해서는 각각 벌금형과 기소유예를 받거나 재판이 진행 중이다. 횡령 혐의는 지난해 무혐의 처분됐다.
◇학생들의 피땀, 용역비는 어디로
이밖에도 수사나 재판으로 번지지 않은 연구실 횡령 소문은 셀 수없이 많다. 한 사립대 연구실에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남아있다. 연구실 비용으로 가는 해외 학술세미나에 연구 책임자인 교수 가족이 참석한 것이다. 타대 대학원생인 그가 공동연구자 자격으로 참석하는 것은 사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연구실 학생들은 그의 항공료와 숙박비, 세미나 참가비 등의 출처를 궁금해했다. “공동관리하는 우리 인건비로 데려온 것 아니냐”고 수군거렸지만 교수에게 밉보여 졸업과 향후 취업에 지장이 생길까 마음이 쓰여 아무도 묻지 않았다고 한다.
신영권(가명)씨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수년 전 용역비 규모가 큰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했지만 추가 인건비를 받지 못했다. 연구실 재정 상황이 나아졌는데 학생들 처우는 그대로였다. 얼마 뒤 해외세미나에 다녀온 교수는 웬일인지 학생들에게 고급로션을 선물했다. 학생들은 손등에 로션을 바르며 “6개월 동안 고생한 결과가 고작 이거냐. 1,000만원짜리 로션이니 아껴 바르라”며 헛웃음만 지었다.
모든 대학원 연구실이 문제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공계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이재희(32ㆍ가명)씨는 “교수님을 잘 만난 게 이렇게 행운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학회에 참석해 여러 학교에서 모인 회원들로부터 각 연구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놀랄 때가 많아요. 연구용역을 받아와 인건비를 확보하기부터 쉽지 않다 보니 시약을 구입하는 등 연구실 운영비를 챙기려 부득이하게 행해지는 부조리는 대부분 있습니다. 그 정도가 심각하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이죠. 갓 대학원에 입학하던 때에는 나이가 어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학생들이 성숙해지고 시대가 투명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그것이 수용 가능한 정도인지 아닌지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부조리에 부조리로… 2억원 갖고 도주
한 국립대에서 10년간 석ㆍ박사 과정을 밟은 나현웅(가명)씨는 공대생들 사이에서 ‘용자(勇者)’로 회자된다. 그는 대학원에 다니는 동안 줄곧 지도교수 B씨의 ‘인건비 상납’ 통장을 관리했다. B씨는 대학원생들에게 학교 인근에 숙소를 마련해준 뒤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학생 통장에 입금되는 연구비 중 일부를 돌려달라는 것이다. 이른바 ‘연구비 상납’이다. 당장 대학원 입학 여부에 미래가 달린 나씨는 이 조건을 수용했다. 여러 조교를 거쳐 ‘인건비 상납 통장’ 관리 권한은 나씨에게 넘어왔다. 그러나 쥐꼬리 월급을 받으며 10년을 매달렸는데도 B씨가 자신을 졸업시켜주지 않자, 나씨는 결국 학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인건비 상납 통장’을 챙겨 연락을 끊고 잠적한 것이다. 10년간 모은 통장에는 적어도 2억원 정도가 담긴 것으로 추정된다고 그를 아는 대학원생은 말했다. 통장의 존재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일까. B씨는 나씨를 신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관련 학회 내에서는 “졸업은 못 했지만 노동의 대가는 챙겼지 않느냐”며 웃지 못할 영웅담으로 회자된다.
나씨의 행동이 대단한 것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이 같은 관행을 거스르는 언행이 대학원생들에게는 곧 ‘그동안 투자한 시간을 버리고 꿈꿔온 미래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이지영(가명ㆍ35)씨는 말했다. “학부 졸업 후 9년을 매달렸어요. 빠듯한 연구비 받아 허리띠 졸라매고 가난하게 살면서도 꿈을 이루리란 희망으로 버텼죠. 그런 제가 연구실 부조리를 고발한다는 건 스스로 생존권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어요. 교수님이 잘못되면 제 미래도 통째로 날아가니까요.”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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