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만능주의’ ‘권력의 부패’ ‘배금사상’ ‘상납풍토’ ‘치맛바람’
1981년 추석 즈음 신문 지면을 도배한 단어들이다. 경제 호황기를 타고 값비싼 추석 선물을 주고 받는 이들이 늘어나자 이를 경계하는 신문 사설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절이다. “산과 들에는 오곡백과가 주렁주렁 결실하여”로 시작해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도 있지만 불치의 병으로 악화되기 전에 이런 병폐는 되도록 조기수술”해야 한다는 말로 끝나는, 할아버지 덕담 풍의 사설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지던 시절이기도 하다.
◇ 50년대, 추석 선물 최고 인기는 ‘먹거리’
추석 풍경은 사회 변화를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지표 중 하나다. 그 중에서도 추석 선물의 변화는 흥미롭다. 전쟁 직후인 50년대 인기 있는 추석 선물은 주로 먹을 것이었다. 신세계백화점이 1995년 내놓은 ‘광복 50년, 추석 선물 50년’ 책자에 따르면, 먹을 게 부족했던 당시 서민들은 추석에 달걀, 돼지고기, 밀가루, 토종닭 등을 서로 나눴다. 60년대 들어서는 라면, 맥주, 세탁비누, 다리미 등이 부상했다. 가장 인기 있었던 품목은 설탕. 1965년 최고로 인기를 끈 선물은 6㎏짜리 설탕으로, 값은 780원이었다고 한다.
◇ 추석선물 대중화된 70년대, 고가 선물 등장하는 80년대
일부 사람들에 한정됐던 추석 선물 풍습이 대중으로 퍼진 건 70년대부터다. 산업화의 진전으로 선물의 종류가 크게 다양해져, 60년대 100여종이었던 것이 약 1,000여종으로 늘었다. 화장품, 스타킹, 속옷, 양산, 라디오 등 식생활과 무관한 선물을 주고받기 시작했고 70년대 말에는 흑백 TV, 보온밥솥, 가스레인지 등 가전제품이 인기 선물로 부상했다.
80년대는 고급화의 시기다. 31만6,000원짜리 양주와 22만3,000원짜리 화장품 세트, 16만5,000원짜리 넥타이가 추석 선물로 나왔고, 이와 맞물려 한쪽에선 ‘검소한 추석을 보내자’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호화롭게 포장된 갈비세트가 등장해 선물계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것도 이 즈음이다.
◇ 90년대, 추석선물 절대 강자 ‘상품권’ 등장
현물이 절대적이었던 시장은 90년대 들어 상품권이 등장하면서 큰 변화를 겪었다. 1994년 상품권 발행이 처음 허용되면서 상품권은 대번에 ‘가장 선호하는 선물’ 1위에 올랐다. 모 경제지는 1996년 9월 14일자에는 “경기 침체로 선물용품 매기가 전반적으로 위축되고 있는 가운데 상품권은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며 “상품권이 갈비와 정육세트 등 전통적인 선호 품목을 제치고 가장 많이 팔리는 선물로 자리잡을 전망”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훈훈하던 분위기는 1998년 ‘IMF 사태’를 맞으며 급변한다. 1998년 9월 18일자 모 일간지 1면에 ‘차라리 한가위가 없었으면’이라는 제목으로 ‘검은 추석’의 풍경을 스케치했다. 기사는 “골 깊은 불황에 구조조정 한파가 겹쳐 직장 분위기가 가라앉은 데다 기업체마다 경비절감을 위해 매년 지급했던 특별 상여금 귀향비마저 거의 없애 귀향길에 나설 직장인들 호주머니가 썰렁하다”고 전했다.
◇ ‘효도성형’ 등장하는 2000년대
2000년대부터는 추석 선물로 효도 성형, 기프티콘 같은 생소한 단어들이 등장했다. 웰빙 열풍으로 와인, 올리브유 등이 인기 선물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2010년대엔 1인 가구란 말이 부상하면서 선물은 간소화하는 추세를 띠었다. 예전처럼 4인 가족이 먹을 대용량 선물 대신 소포장 선물, 추석 간편상 등의 판매가 높았다.
지난해 추석을 강타한 단어는 청탁금지법, 일명 김영란 법이다. 법 시행 후 처음 맞는 추석에 5만원 이하로 맞춘 선물세트들이 백화점 매대를 장식했다. 올 1월 김영란 법 시행령 개정으로 선물 금액 상한선이 농축수산물에 한해 5만원에서 10만원으로 올라가면서 이번 추석은 한우, 사과, 배, 굴비가 인기를 회복했다. 이마트에 따르면 한우세트의 매출은 지난해에 비해 60.6% 올랐으며 굴비도 51.5%나 더 팔렸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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