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라는 감정이 밀려오기도 전에 이런 생각부터 들었어요. ‘아, 오늘은 정말로 집에 들어가야겠다. 죽지 않으려면.’ ”(넥슨 노동조합 배수찬(33) 지회장)
딱 죽지 않을 만큼 일하는 게 당연했다. 한 때는 판교의 새벽을 유유히 밝히는 불빛에 가슴이 뛰었다. 믹스 커피 세 봉지를 한 컵에 몽땅 털어 넣으면서도, 커다란 모니터 앞에 붙어 앉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면서도, ‘열정’을 연료 삼아 버틴다 믿었다. 2016년 겨울, 한 게임 개발자가 세상을 뜨기 전까진. 업계 용어로 일명 ‘크런치 모드(Crunch Mode)’, 신작 게임 출시를 목전에 두고 있던 넷마블네오 소속의 개발자 A씨는 주당 80~90시간씩 철야 근무를 하던 도중 돌연 숨졌다. 사인은 ‘과로’.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 바닥이 참 좁아요.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람들이었어요. 내 바로 옆 동료가, 나와 같은 일을 하다가 죽어나간 거나 마찬가지였던 거죠.”(김태효(43) 사무국장) 세상을 떠난 이들의 나이는 모두 20대, 그들이 갈아 넣고 있는 것은 열정이 아니라 아까운 청춘이었고, 단 하나뿐인 목숨이었다.
“누군가 총대를 메고 바꿔주길 바랬죠. 아마 모두가 그렇지 않았을까요.”(넥슨 노조 홍종찬(32) 수석부지회장) ‘언젠간 바뀌겠지’란 희망은 ‘저절로 바뀔 순 없다’는 깨달음에 닿자 부서졌다. “지난 6월,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을 위한 노사협의회에 근로자 대표로 참가를 했어요. 바로 그 때 회사의 태도와 행동을 직접 지켜보면서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김태효) 그래서 동료들을 설득했다. “아직 그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 우리가 같이 한번 가 봅시다.” 게임 업계 최초의 노동조합인 넥슨 노조(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넥슨 지회)는 바로 이렇게 탄생했다. 출범 첫날 ‘일단 100명만 채워보자’는 결심이 무색하게도 가입자 수는 300명을 돌파했고, 열흘 째인 13일 기준 조합원은 800명을 훌쩍 넘겼다. 백마 탄 초인처럼 홀연히 등장한 이들, 업계 1호 넥슨 노조 운영진을 12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넥슨 코리아 본사 인근에서 만났다.
◇ 답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동의만 해라?
“회사는 시종일관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만 말했어요. 근로자들이 적극 나서 문제를 제기하려고 해도 ‘당장은 해결이 힘들지만 차차 고려는 해 보겠다’는 식의 애매한 답변을 되풀이했죠.”(김태효)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을 한 달 앞둔 지난 6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측은 배씨와 김씨를 포함한 근로자 대표 3인을 협상 테이블에 앉혔다. “매일 밤, 판교엔 오징어배가 뜬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초과근무가 일상인 근무환경에서 ‘주 52시간’은 지각변동에 가까운 충격이었다. 더군다나 게임 개발은 스토리 창작부터 프로그래밍, 그래픽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의 개발전문가가 함께 작업해야 하는 ‘복합 지식노동’인만큼, 근무 시간을 일괄 적용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대안은 ‘유연 근무제’뿐이었다.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국내외 사례들을 여러 개 찾아 들고 갔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유연근무제도 ‘코어 타임’(하루에 일해야 하는 최소 시간)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형태가 다양해질 수 있거든요. 사측은 이미 모든 기준을 세팅해 놓은 상태더라고요. ‘여러 가지 현실적 요건을 고려한 결과, 이 방법이 최선이다’라면서.”(김태효) 사측의 기준은 이랬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점심시간을 제외한 4시간은 회사로 출근해 일할 것.’ 출퇴근 시간이 고정돼 있기 때문에, 각자 원하는 시간에 출근해 정해진 시간을 채운 뒤 자율적으로 퇴근하는 방식보다 제약이 많았다. “이 규정에 따르면 오전 7시에 출근한 사람이나 11시에 출근한 사람이나 퇴근시간이 오후 4시로 일괄 적용돼요. 일찍 나와도 일찍 집에 갈 수가 없는 거죠. 근로자를 최대한 회사에 오래 머무르게 하기 위한 일종의 꼼수예요.” 게다가 인사팀이 발표한 가이드라인에는 노사협의과정에서 언급된 바 없던 ‘조직장의 권장에 따라야 한다’는 규정이 추가됐다. “해석하기에 따라, 권장이 아닌 명령이 될 여지가 높아 보였죠. 예를 들어, 조직장이 ‘우리 팀은 다같이 매일 9시에 나옵시다’라고 거듭 ‘권장’을 한다면, 누가 거기에 ‘싫은데요’하고 맞설 수 있겠어요.”(배수찬)
“근로자를 대표해 그 자리에 참석했지만, 막상 협상장에 가보니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기 힘든 상황이었어요. 저희도 바로 물러서진 않았죠. 거듭 요구한 끝에 1~2시간 단위로도 휴가를 낼 수 있게 하는 ‘시간제 휴가’를 확정적으로 도입을 하겠다는 동의를 받아냈거든요.”(배수찬) 그러나 막상 노사협의가 끝나고 올라온 공지는 딴판이었다. ‘확정적’이란 표현은 간 데 없고, 그저 ‘검토해보겠다’는 두루뭉술한 문구만 남았다. “그 때 깨달았어요. 아, ‘근로자 위원’의 권한만으론 부족하겠구나. 사측이 협의를 거부했을 때나 협의된 내용을 이행하지 않았을 때 가할 수 있는 패널티가 사실상 없는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노조가 필요하겠단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업계에선 최초,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지만 다행히도 비빌 언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올해 4월 출범한 IT업계 최초 노조인 ‘네이버 노조’에 SOS를 청했다. “설립 방법부터 운영, 노동자들을 설득하는 전략까지 많은 도움을 받았죠.” 회사 눈을 피할 공간이 마땅치 않아, 네이버 본사 내 노조 회의실까지 빌려 썼다. “준비에 두 달 밖에 걸리지 않은 건 네이버 노조의 덕이기도 해요. 이제 저희가 게임업계 1호가 됐으니, 2호로 출범한 ‘스마일게이트 노조’는 물론, 제3호, 4호가 될 분들에게도 도움을 드리고 싶어요.”(배수찬) 모든 게임 회사에 빠짐없이 노조가 생기는 그 날을 꿈꾸며 시작한 도전이니만큼, 이들의 어깨는 무겁다. “큰 책임감을 느낍니다. 반드시 ‘좋은 선례’를 만들어 가야죠.”
◇몸도 정신도 ‘으드득(Crunch)’ 갈려나가는 ‘미친 관행’
“‘크런치 모드’는 개발자들에겐 피할 수 없는 일상이에요. 짧게는 1~2주, 평균적으로는 한 달인데, 정말 길게는 3개월까지도 가죠. 그래서 여전히 52시간을 훌쩍 넘겨 일하시는 분들이 꽤 많아요. 제 주변만 해도 그렇고요. 이렇게 살인적인 야근에 계속 시달리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여유를 잃어요. 극도로 예민해진 사람들끼리 부대끼다 보면 불화가 생기는 건 당연한 거고요.” (홍종찬)
건장한 이십 대 청년의 목숨을 앗아간 바로 그 ‘크런치 모드’는 이 업계 사람들에겐 삶의 일부다. 마감기한에 가까워질수록 업무 강도는 점점 더 높아지고, 출시 직전엔 아예 ‘퇴근’이란 개념 자체가 사라진다. 귀가하지 못한 직원들이 휴대폰을 붙잡고 어린 자식의 목소리를 한마디라도 더 듣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사내에 편의시설이 들어오기 전엔, 사무실 한 켠에 ‘비상식량’ 컵라면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한 때는 ‘그래, 우리의 희생으로 이렇게 멋진 게임이 만들어지는 거지’라고 생각했죠. 어? 근데 시간이 지나니까 좀 이상해요. 그렇게 만든 게임이 전혀 멋지지가 않은 거예요.”
사측은 ‘생산성을 극적으로 증대시키기 위해 크런치 모드는 필수불가결하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한참 다르다. “단순생산직이 아니잖아요. 개발자들은 쉼 없이 머리를 써야 해요. 야근을 많이 하면 무조건 실수가 잦아질 수밖에 없죠. 그러다 보면, 눈 앞에서 버그가 계속 나오는데도 ‘아, 모르겠다… 쳐다보기도 싫다…’ 이러고 있어요. 당장 내가 죽겠으니까.”(홍종찬) 크런치 모드가 유난히 길었던 게임에 결함이 많은 이유다. 한번 형편없는 음식을 내놓은 식당엔 영영 발길을 끊듯, 실망한 사용자들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이런 게임은 결국 개발자에게도, 회사에게도, 사용자에게도 손해만 남긴 채, 게임 생태계에서 자연 도태된다.
“게다가 크런치 모드는 신규 개발 과정에서만 ‘예외적’으로 발생하는 게 아니거든요.”(김태효) 게임이 일단 출시되고 나면, 정기적으로 ‘패치’(기존 게임에 새로운 캐릭터나 아이템, 지역 등을 추가해 업데이트하는 것)가 필요하다. 바로 이 패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로 크런치 모드가 이어진다. “패치 주기는 게임 별로 다 다르지만, 정말 잦은 경우 일주일 단위일 때도 있어요. 예를 들어 목요일 새벽에 패치가 있다면, 화ㆍ수ㆍ목은 자연스럽게 크런치 모드인데, 그럼 일주일 중 거의 절반 가량을 야근하는 셈인 거죠.” 누군가 나서 강제로 시키는 건 아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나를 제외한 모든 팀원들이 야근을 하고 있어요. 당장 내일이 공개인데 기능이 안 돌아가요. 집에 갈 수 있겠어요?”(홍종찬) 완성된 게임을 테스트하는 ‘QA(Quality Assurance)’ 일정도 맞물려 있기 때문에, 한번 마감이 연기되면 그 결과를 모든 분야의 직원들이 함께 책임져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다. 개발자들 대부분이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노동자 쥐어짜는 포괄임금제가 원흉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모두가 야근을 하게 만드는 이 ‘촉박한 마감기한’은 대체 누가, 어떻게 정하는 걸까. “보통 그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있는 디렉터가 정해요. 하지만 그들을 마냥 탓할 수도 없어요. 이들도 결국은 갑(甲)이면서 을(乙)이거든요.” 경영진으로부터 실적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디렉터들도 무리한 일정을 강행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게임이 출시된 이후에 사용자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게 되면, 팀 인원이 줄거나 아예 프로젝트가 자체 종료돼버릴 수도 있어요. 그러니 무리를 해서라도 대규모 패치를 시도하게 되는 거죠.” 캐릭터만 리뉴얼해도 되는데, 한걸음 더 나가 아이템도 추가하고 새로운 배경까지 만드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죽어나는 건 개발자들이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면 팀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디렉터들의 사정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결국은 ‘사람을 쥐어짜는, 사람 값을 마구 후려치는’ 이 시스템의 문제다. 이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포괄임금제만 없애도 많은 것이 바뀔 거에요. 지금은 근로자가 일을 80시간 하든 50시간 하든 같은 돈을 받거든요.” ‘포괄임금제’란 근로계약 체결 시 초과 근무에 대한 수당을 미리 정한 후 기본수당에 포함해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 넥슨을 포함한 대다수의 게임 업체들이 채택하고 있는 제도로, 현재 업계에서 ‘시간외 근로수당’을 지급하는 회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걸 폐지하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회사에게 일 시킨 만큼 돈을 줘야 하는 ‘책임’이 생긴다면 어떨까요? 감히 예상컨대 이렇게까지 일 못 시킵니다. 천문학적으로 나가는 돈이 무서워서라도요.” 그래서 이들 노조의 첫 번째 선별 과제 또한 ‘포괄임금제 폐지’다. 지난 7월, 사측과의 교섭을 통해 포괄임금제를 공식 폐지한 네이버 노조의 사례는 든든한 발판이다. “‘일한 만큼 받고 싶다’는 당연한 요구, 이제는 정말로 당당하게 해보렵니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대기업 정규직
“저희는 드라마나 예능을 만드는 스태프들 처지랑 비슷해요. <무한도전>처럼 10년 이상 장수하는 게임이 있는가 하면, 출시도 못해보고 엎어지거나 인기가 없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게임도 있어요. 사실은 후자가 더 많죠. 그럼, 그 팀 개발자들은 어떻게 될까요?”(배수찬)
한마디로 ‘갈 곳 없는 처지’가 된다. 스무 명 남짓의 작은 스타트업이든 수 천명 규모의 대기업이든 사정은 다르지 않다. “여전히 ’넥슨’ 소속이지만, 사실상 실직 상태가 되는 거예요. 가만히 있어도 “어? 너 일 없으면 여기로 와” 하지 않거든요. 이 팀 저 팀 직접 찾아 다니면서 구직활동을 해야 하죠. 이력서부터 쓰고, 면접 보러 다니고…”(홍종찬) 사측은 사내에서 이동 가능한 포지션을 확인하고 구성원을 연결하는 절차를 제공해 최대한 많은 인원이 사내에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쪽 팀이 공중 분해된다고 해서, 저쪽 팀에서 자리가 뚝딱하고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전환배치는 하늘의 별 따기다. 결국 팀을 제때 찾지 못하면, 선택지는 단 하나, ‘권고사직’뿐이다. 이직이 밥 먹듯 흔한 이유다.
“보통 사직을 권유할 땐, 이렇게 얘길 해요. ‘지금 이 상태에서 대기하고만 있으면 발전할 기회가 없다. 3개월치 급여를 챙겨줄 테니 지금 나가서 얼른 다른 일을 알아보라’고요. 대부분이 바로 나가요. 버텨봤자 평판만 나빠지니까. 이직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것도 ‘전 직장에서의 평가’거든요. 하는 일 없이 남아 있으면 본인만 불이익이 되니,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사직서에 사인을 하게 되는 거죠.”(김태효) 명색이 대기업 정규직이지만, 회사가 나가라면 나가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심지어는 전환배치를 고려해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권고사직부터 들이미는 회사도 있답니다. ‘퇴직 위로금이라도 챙기려면 지금 사인하라’며 독촉하거나 ‘3개월 안에는 반드시 나가야 한다’며 강요를 하는 경우도 있고요.”(배수찬) 사실상 해고나 마찬가지지만, 정작 해고된 사람은 없고 ‘제 발로 나간 사람’만 있을 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반년도 못 채우고 내쫓기는 건 부지기수, 바로 어제 첫 출근했는데 오늘 팀이 없어져서 나가는 경우까지 나온다. 당연히 ‘고용 안정’은 들어본 적도, 경험해 본 적도 없는 그림의 떡이다. “90년대 말, 한국에서 게임 산업이 막 폭발적으로 성장할 당시만 해도 팀 단위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손발이 맞는 사람들끼리 회사를 옮겨 다니며 계속 함께 게임을 만드는 식으로요. 그렇게 ‘유목 생활’을 하며 산업을 키우다 막상 정착하려고 보니 땅이 너무 척박한 거죠.”(김태효) 직원도 팀장도 사장도 모두 20대였던 ‘개척의 시대’는 끝난 지 오래. 대기업 위주로 재편된 게임 산업은 매출 규모만 늘고, 인력 규모는 줄어드는 정체기를 맞았다. 40대가 된 개국공신들조차 갈 곳을 잃은 상황. “그 분들은 체력이 달려서 야근을 할래야 할 수도 없어요. 이직도 불가능하죠. 아무리 평사원처럼 일 하겠다고 해도 받아주질 않으니까요.”(배수찬) 어느덧 가정이 생긴 이들에게 ‘언제 어떻게 팀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은 매 순간, 온 몸으로 느껴지는 공포다. “노조 가입자 중 유독 엄마, 아빠가 된 분들이 많은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우리는 매출 장부 숫자가 아닌, 사람이다
“몇 달 전, 외국 언론에서 발표한 ‘한국 부자 순위’를 봤어요. 10위 안에 게임 회사 대표만 3명이더군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대박 나는 게임이 있으면, 회사는 커지고 사장님은 돈을 쓸어 담는데… 어째서 그걸 만든 사람들은 여전히 힘든 걸까.”(김태효)
사장이 대한민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인 모 게임 회사의 경영진 회의에선 최근 이런 말이 나왔단다. “이 매출 지표 좀 보세요, 직원들 야근 못 시키니까 매출 떨어지는 것 아닙니까?” 이들에게 사람은 어디까지나 숫자다. ‘쥐어짠 시간만큼 돈으로 환산되는 대상’.
“아니요, 우린 숫자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래서 노조를 만들었어요. ‘여기에도 사람이 있다’고 외치기 위해서요.”(김태효) 그렇다. 그들은 사람이다. 죽도록 일하는 와중에도 끝내주게 멋진 게임을 만들고 싶은, 그 누구보다 뜨겁게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같은 팀 동료가 ‘이런 걸 고쳐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오면 자꾸 속에선 화가 났어요. 게임의 퀄리티를 올리기 위해서 너무 당연한 요구인데도... 죽을 힘을 다해 정말 간당간당 버티고 있는 사람은 지푸라기만 스쳐도 무너지니까.”(배수찬) 그렇지만 벼랑 끝에 선 이에게 ‘더 잘하고 싶다’는 욕망은 사치가 된다. 결국은 ‘사람답게 일해야 좋은 게임도 만들 수 있다’는 깨달음이 이들에게 용기를 줬다.
“회사가 마음에 안 들면 더 좋은 데 찾아 나가면 된다고요? 글쎄요, 모두가 떠나기만 하면,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요. 저는 지금이야말로 ‘테라포밍(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의 환경을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해요. 근로자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는 회사가 되면, 실력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들어 올 거고, 그럼 좋은 게임도 더 많이 나오지 않을까요? (웃음) 경영진분들! 잘 생각보시죠. 결국엔 윈-윈이랍니다!“(홍종찬)
“어느 순간 주위를 둘러보니, ‘야! 너!’ 할 수 있는 친구들이 한 명도 남아있질 않더라고요. 같이 시작한 동료들 모두가 결국 떠났어요.”(배수찬) 이들 중 아직 게임 만드는 일을 놓지 못한 이가 있다면, 어디선가 분명 ‘미친 듯이’ 일하고 있을 게 뻔하다. “그래서 이 업계 전체에 노조가 생겼으면 해요. 넥슨과 넥슨 직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게임 업계의 노동자 모두가 함께라면 더 큰 힘이 되지 않을까요.”
“점심에 밥을 먹고 있는데, 바로 옆자리에서 저랑 일면식도 없는 사우께서 열변을 토하며 동료를 설득하고 계시더라고요. ‘당장 노조 가입해!’(웃음)” 이제 그는 소리 없이 떠나간 동료들이, 함께 게임을 만들며 울고 웃던 친구들이 그립지 않을 것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비슷한 세월을 견뎌낸 모두가 ‘아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여 서로의 울타리가 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노동자 권리의 스타팅 포인트를 세웁니다.’ (2018년 9월 3일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넥슨지회 선언문)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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