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19일 밤 평양 능라도 5ㆍ1 경기장에 운집한 15만명의 평양 시민에게 남측 지도자 최초로 육성 연설을 했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나는 북과 남 8,000만 겨레의 손을 굳게 잡고 새로운 조국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함께 새로운 겨레로 나아가자”고 했다. 자주, 동포, 형제 등의 표현도 수차례 사용했다. 문 대통령이 평양 시민 앞에서 굳건한 남북관계를 만들자는 뜻을 천명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문 대통령은 이날 집단체조 관람을 마친 뒤 오후 10시 20분쯤 단상에 나가 “남쪽 대통령으로서 김 위원장의 소개로 여러분에게 인사말을 하게 되니 그 감격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며 “우리는 이렇게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 위원장과 북녘 동포들이 어떤 나라들을 만들고자 하는지 가슴 뜨겁게 보았다”며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언급했다. “공동번영과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기자”고도 했다.
문 대통령은 “어려운 시절에도 민족 자존심을 지키며 끝끝내 스스로 일어나고자 하는 불굴의 용기를 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민족은 우수하다. 우리 민족은 강인하다.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한다”며 “그리고 우리 민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고 했다. 또 “우리는 5000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지난 70년 적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평화의 큰 걸음을 내딛자고 제안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위원장에 대한 헌사도 있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나는 나와 함께 이 담대한 여정을 결단하고 민족의 새로운 길을 향해 뚜벅뚜벅 걷고 있는 여러분의 지도자 김 위원장께 아낌 없는 찬사와 박수를 보낸다”고 했다. 문 대통령이 발언을 할 때마다 평양 시민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성을 보냈다.
앞서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을 소개하면서 “오늘 문 대통령이 역사적인 평양 수뇌상봉과 회담을 기념해 평양 시민 여러분 앞에서 직접 뜻 깊은 말씀 하시게 된 걸 알려드린다”고 했다. 이어 “오늘의 이 순간 역시 역사는 훌륭한 화폭으로 길이길이 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이 연설하는 7분 남짓한 시간 동안 수차례 박수를 보냈다.
남측 대통령이 북한 대중을 상대로 공개 연설을 한 것은 처음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문 대통령에게 제공한 최고 수준 영접의 하나라는 평가다. 지난 4월 이후 세 차례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쌓은 정상 간 신뢰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 김정숙ㆍ리설주 여사는 이날 오후 9시쯤 5ㆍ1 경기장에 입장해 약 한 시간 가량 환영예술공연 ‘빛나는 조국’을 관람했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모습을 드러내자 15만명의 평양 시민들은 기립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문 대통령은 북측 화동(花童)으로부터 꽃을 건네 받은 후 시민들을 향해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문 대통령이 관람한 빛나는 조국은 북한 정권 수립 70주년인 9월 9일(9ㆍ9절) 때 처음 공개된 체제선전 공연이다. 대(大)집단체조극인 ‘아리랑’을 드론, 레이저, 미디어 아트 등 최신 기술로 업데이트한 게 특징이다. 기존 체제선전 공연과 달리 반미(反美) 구호를 빼고,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4ㆍ27 남북 정상회담 장면도 넣었다.
빛나는 조국이 북한 체제의 우월성과 정당성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관람의 적절성 논란도 제기된다. 다만 북측은 이 같은 논란을 고려해 관련 내용을 상당히 수정했다고 한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북측이 준비 과정에서 우리의 입장을 최대한 고려했다”고 했다.
정지용기자 cdragon25@hankookilbo.com 평양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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