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새 친구 만들면 장례식 갈 일만 늘어나.” <태풍이 지나가고="">中
‘멍하니 있으면 치매 걸린다’며 새 친구라도 만들라는 딸의 핀잔에 느릿느릿 응수하는 노모의 한 마디. 순간 실없는 웃음이 터지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곰곰이 되뇔수록 어딘가 뒷맛이 씁쓸하다. 반찬 떨어질 때 말고는 혼자 사는 엄마의 집을 먼저 찾아본 적 없는 딸에게 흠뻑 이입한 관객이라면 어쩐지 뒷골까지 서늘해진다.
일본의 ‘국민 어머니’로 불리는 배우 키키 키린(본명 우치다 게이코)이 보여준 ‘엄마의 모습’은 늘 그랬다. 자식이 애써 감추려 하는 삶의 치부를 능청스레 모르는 체 해주다가도, 잠시 긴장을 놓는 순간이면 부지불식간에 ‘훅’ 치고 들어온다. 스스로를 ‘대기만성형’이라 칭하는 15년 차 작가 지망생 아들에게 “뭐 그리 오래 걸리냐, 서두르지 않으면 나 귀신 될 거야”라며 일침을 가하는가 하면(영화 <태풍이 지나가고>), 과부로 시집 온 며느리를 두고는 “고르고 고른 게 하필이면 중고라니, 게다가 사별은 죽은 남편과 비교당해서 힘들어”(영화 <걸어도 걸어도>)라며 투덜거린다. 대수롭지 않게 섬뜩한 소리를 툭툭 뱉어대는 영화 속 그의 모습을 응시하다 보면, 어쩐지 ‘나의 엄마’가 떠오른다. 현실 속 어머니들은 결코 상냥하고 자애롭기만 한 드라마 주인공이 아니기에. 때로는 뻔뻔하고 때로는 잔인하기까지 한 키키 키린의 연기는 자식의 일이라면 종종 ‘노골적인 속물’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현실 어머니’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올봄, 일본을 대표하는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함께한 6번째 장편 영화 <어느 가족>이 2018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키키 키린은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지만, 이 작품은 그의 영화 인생에 마침표를 찍는 유작이 됐다. 지난 15일, 그는 14년 간의 긴 암 투병생활 끝에 숨을 거뒀다. 향년 75세. 열여덟 살에 극단 배우로 시작해서 반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연기를 쉬지 않았던 그를 두고 일본의 영화인들은 말한다. “키키 키린은 단 한 마디의 애드리브조차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해 완성하는 ‘진짜 배우’였다”고. 그 진짜 배우의 반세기 연기 인생을 되짚어봤다.
◇40년간 한 번도 뻔하지 않았던 ‘어머니’
1971년, 텔레비전 코미디 드라마에 얼굴을 비추며 그는 비로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3년 후,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드라마 <데라우치 간타로 일가>에서 주인공 간타로의 어머니 역할을 맡는 ‘파격 행보’로 대중의 마음을 얻었다. 아들 역할을 맡은 고바야시 아세는 당시 키키 키린보다 10살이나 많은 중년배우였다. 그는 노파처럼 보이기 위해 머리카락을 하얗게 탈색까지 했는데, 분장에 들인 노력과는 별개로 그에겐 ‘할머니 연기’가 가장 쉬웠다고 한다. 배우로 이름을 알린 건 늦었지만, 전문분야만큼은 남들보다 빠르게 찾은 셈이다. 키키 키린은 이때를 기점으로 ‘어머니 연기’의 대표 주자가 됐고, 40년 동안 매번 ‘뻔하지 않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의 인생 자체는 ‘전통적인 어머니’상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20대 초반에 결혼과 이혼을 연달아 겪은 뒤, 30대엔 유명 록스타와의 염문을 뿌리며 화려하게 재혼했지만 채 1년도 되지 않아 별거. 순탄치 않은 청춘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키키 키린이 연기하는 어머니는 ‘자기희생을 마냥 신성하게 여기는’ 관습적인 캐릭터가 아니다. 얌전한 취미생활을 권하는 딸에게 “엄마는 파칭코도 못하니?”라며 쏘아붙이는 모습(<걸어도 걸어도>)이나,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급기야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시댁을 탈출하는 모습(<오다기리죠의 도쿄타워>)은 ‘순종과 정숙이 최고의 미덕’이었던 당대의 어머니상과 어긋난다. 이처럼 ‘어머니 캐릭터’의 전형성을 ‘어머니이자 동시에 인간이기도 한 입체적 인물’로 다양하게 변주한 것은 키키 키린만의 개성이자 강점이었다. 뻔한 가족드라마처럼 보여도 이야기의 중추에 그가 자리하는 순간, 팽팽한 긴장감이 살아났다. 그것은 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궁극의 존재감이었다.
◇마치 그 자리에 10년을 머문 사람처럼…
“아주 작은 몸짓 하나라도, 수십 번을 반복해 연습했어요. 키린 씨가 마치 그 자리에서 10년 넘게 살아온 사람같이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전골 국물을 젓가락으로 휘휘 젓는 모습, 요리에 한창 집중한 나머지 엇박자를 타며 느릿해진 말투, 그러다가도 재빠르게 국물 한 방울을 손등 위에 한 방울 툭 떨어뜨리고는 날름 간을 보는 모습… 주방과 한 몸이 된 듯 동작 하나하나가 살아난 키키 키린의 생활연기는 단연 일품이다. 2008년 <걸어도 걸어도>를 시작으로, 10년간 자신의 거의 모든 작품에 키키 키린을 캐스팅해 온 고레에다 감독은 “그는 절대로 그 자리에서 생각난 대로 연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하나하나 뜯어볼수록 감탄을 자아내는 그의 연기는 ‘장인’을 방불케 할 정도로 공을 들인 ‘치밀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실제로 키키 키린은 고레에다 감독과의 인연 또한 스스로 만들어냈다. <걸어도 걸어도>에 이미 다른 배우가 내정돼 있었지만, “자신보다 더 적합한 배우는 없다”며 감독을 설득해 배역을 따낸 것이다. “주인공 부부가 결혼 후 처음으로 형의 기일을 맞아 어머니의 집을 찾는 장면이었어요. 현관에서 어색하게 인사를 마치고 집안으로 들어가는데 어머니가 준비해둔 슬리퍼를 신는 걸 잊어버린 겁니다. 그러자 갑자기 키린 씨가 바로 이 슬리퍼를 들고 허리를 구부린 채 종종걸음으로 그들을 따라갔어요.” 각본에는 없던 연기였다. 감독이 컷을 외치자 카메라맨이 넌지시 이런 말을 건넸다고 한다. “최고잖아… 몸을 굽힌 저 모습” 고레에다 감독은 그 엉거주춤한 모습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고 회고했다.
◇불행을 피할 수도 즐길 수도 없다면…
‘삶이 영화고, 영화가 삶’이었던 그에겐, 예고 없이 닥쳐온 불행 또한 그 자신이 연기하게 될 인물의 ‘한 부분’이 됐다. 2004년 유방암을 선고받은 뒤, 투병과정에서 촬영한 <오다기리죠의 도쿄타워>에서 키키 키린은 암으로 끝내 세상을 등지게 되는 어머니 역을 연기했다. 극도의 괴로움 속에서 서서히 생명을 잃어가는 과정을 절절히 보여준 그는 당시 ‘주인공의 어머니’의 배역으로는 이례적으로 제31회 일본 아카데미상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 절반밖에 안 나왔는데 상을 받아가서 미안하다”는 수상소감은 재치 있는 겸양이었다. 그의 아들 역을 맡았던 배우 오다기리 죠는 “감히 키키 키린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고 회상했다.
진짜 암환자로 ‘암환자 역’을 연기한 이후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2013년 재발한 암이 온몸으로 퍼졌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각종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키키 키린은 그렇게 인생의 매 순간을 ‘마지막 순간’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살아냈다. 그에겐 어쩌면 오직 ‘연기’야말로 불행한 운명을 피하지 않으면서도, 그 운명에 사로잡히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독보적 존재감’을 가진 자만의 ‘독보적 자신감’
“아이들이 주인공인 영화인데 어른 장면이 조금 많은 것 같아. 이 이야기에서 어른은 ‘배경’이니까. 다들 능숙히 배경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들이잖아. 어른을 클로즈업하거나 돋보이게 만들 필요는 없어.”
두 소년이 주인공인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을 촬영하기 직전, 키키 키린은 고레에다 감독을 따로 불러낸 자리에서 기꺼이 ‘배경’이 되기를 자처했다. 자신의 연기뿐 아니라 ‘영화 전반의 흐름’까지 염두에 둔 조언이었다. ‘배우의 명성과 영화 내 비중은 비례해야 한다’는 세간의 편견에 흔들리지 않도록, 영화의 진짜 주인공인 ‘아이들’의 얼굴을 더 섬세히 담아낼 수 있도록 감독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었다.
독보적 존재감을 갖춘 배우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기도 했다. ‘연기는 한낱 패션쇼가 아니다. 배우라면 자신의 독창성을 드러내야 한다’며 후배들을 꾸짖던 그의 말마따나 키키 키린은 극 전반을 이끄는 주연으로든, 1분 남짓 등장하는 카메오로든 언제나 관객의 마음에 가장 깊은 파문을 남기는 캐릭터였다.
느릿느릿한 말투로 가만가만 늘어놓는 엉뚱한 이야기들, 늘 따사롭지만 때때로 벼락같이 서늘해지는 눈빛…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자신만의 개성’으로 연기해온 키키 키린은 유작 <어느 가족>의 한 장면에서 바닷가를 철없이 뛰노는 가족들을 향해 혼자 소리 없이 속삭인다. “그동안 고마웠어”라고. 어쩌면 그의 마지막 대사는 그의 영화를 사랑해 온 전 세계 관객 모두를 겨냥한 ‘완벽한 애드리브’가 아니었을까.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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