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소년 삼보가 밀림에서 호랑이떼와 맞닥뜨렸다. 옷을 하나씩 빼앗기며 도망치다 나무위로 올라갔다. 호랑이떼는 나무 밑에서 꼬리를 물고 뱅뱅 맴돌다 녹아 버터가 돼 버렸다. 삼보는 호랑이 버터로 팬케이크를 구워먹었다. 동화 ‘꼬마 검둥이 삼보’의 내용이다.
그런데 잠깐, 호랑이는 아시아에만 서식하는 동물이다. 따라서 삼보의 인종을 바탕으로 이야기의 배경을 아프리카라고 추측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일본의 작가 요네하라 마리(1950~2006)는 ‘미식 견문록’에서 이야기의 앞뒤를 파헤친다. 인도가 식민지였던 시절 남편과 의료 활동을 벌이던 영국 여성 헬런 배너만이 원작을 썼으며, 인도 아이를 쫓던 호랑이떼가 정제버터인 기(ghee)로 변해 난(인도식 빵)을 구워 먹었다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버터와 팬케이크 이야기로 유통되는 걸 보면 어떤 경로로 와전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된장처럼 발효시킨 발효버터
인도 이야기이므로 정제버터 기의 등장이 더 자연스럽지만, 호랑이가 보통의 버터가 되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크림에 원심력을 가하면, 즉 계속 휘저으면 유지방이 분리되어 버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에서도 버터를 만들 수는 있다. 믹서 등으로 크림을 저어 분리된 유지방을 손으로 빚으면 된다. 남은 액체는 버터밀크라 부르는데, 산성 액체라 신맛도 나지만 베이킹파우더와 반응해 효모로 발효시키지 않는 즉석빵(퀵브레드) 반죽을 부풀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이렇게 화학적인 가공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물리적으로 분리한 유지방의 버터를 ‘스위트 크림(Sweet Cream)’이라 일컫는다. 화학적 가공이라니? 일단 우려부터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안심해도 좋다. 우유의 화학적인 가공 과정이라고 해봐야 발효일 뿐이다. 그렇다. 크림에서 유지방을 물리적으로 분리만 해서 만드는 버터가 있다면 우유를 발효시킨 다음 만드는 버터도 있다. 김치와 된장이 발효로 복잡한 맛을 내듯 유산균으로 우유를 발효시켜 만든 버터는 스위트 크림보다 맛이 조금 더 섬세하다. 헤이즐넛 같은 견과류의 고소함이 두드러지고 끝에는 산뜻한 신맛도 감돈다. 이렇게 일단 버터의 세계가 둘로 나뉜다.
◇빵에 발라 먹을 때는 가염버터, 요리할 땐 무염버터
버터를 분류하는 또 다른 기준은 소금이다. 무염버터와 가염버터 말이다. 냉동 및 냉장이 원활하지 않던 시절에는 소금이 맛 이전에 방부제 역할을 맡았으므로 버터는 일괄적으로 가염버터였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점차 소금의 중요성이 줄어 무염버터가 추가로 생성됐다. 음식 맛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소금으로부터 버터가 자유로워졌다는 의미이다. 맛도 맛이지만 상온(23℃)에서는 고체, 32~35℃로 올라가면 액체로 변하는 물성 덕분에 버터는 서양 요리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지방이자 기본 재료의 지위를 오랫동안 누려 왔다. 비단 빵 같은 데 발라먹을 뿐만 아니라 요리 매개체로 쓰인다. 버터에 간이 되어 있다면 원하는 양보다 더 많은 소금이 조리 과정에 개입해 음식의 맛이 요리하는 사람의 의도와 달라질 수 있다. 버터 한두 조각 쓰는 볶음이나 지짐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녹인 버터를 70~90℃로 달궈 흰살 생선이나 새우살처럼 연약한 재료 전체를 담가 천천히 익히거나 은근히 삶는 조리법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가염버터라면 너무 짜져 요리를 아예 망칠 수도 있다.
그래서 버터의 세계는 소금의 획으로 한 번 더 분리되어 사분면 위에 자리 잡는다. 발효버터와 스위트 크림이 각각 가염과 무염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원칙을 따르자면 가염과 무염 버터를 모두 갖춰 전자는 빵에 발라 먹고 후자는 요리에 써야 할 텐데, 그러면 인생이 본격적으로 피곤해질 수 있다. 따라서 프랑스 요리나 제과제빵을 진지한 취미로 삼지 않는다면 버터의 세계를 애써 구분할 필요가 없다. 그저 생활 패턴에 맞춰 가염과 무염 어느 한 쪽만 선택해서 갖춘다. 빵에 발라 먹기, 즉 ‘생식’ 위주로 버터를 쓴다면 가염만 갖춘다. 다만 공을 조금 들여 소금 함유량 확인을 권한다. 포장재의 기준량 (100g 등)에서 소금의 비율이 높을수록 짜다. 1.5% 안팎, 2%가 넘지 않는 제품을 권한다.
요리나 제과제빵이 일정 수준 취미라면 무염버터에 집중한다. 이론적으로는 소금간이 안 되어 있으니 생식용으로 싱거울 수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지방 함유량이 높거나 발효 버터인 경우 고소함 혹은 풍부함이 밋밋함을 막아준다. 아니면 조금 부지런을 떨어 자신만의 가염버터를 만들 수도 있다. 상온에 꺼내 놓아 부드러워진 버터에 입맛대로 소금을 더해 잘 섞은 뒤 랩이나 유산지 등에 옮겨 담아 형태를 잡고 다시 냉장고에서 굳힌다. 허브 등을 더해 스테이크 등에 곁들이는 ‘맛 버터’ 조리법의 기본을 응용한 것이다.
◇유럽산 버터 지방 함유량이 국내산보다 높아
마지막으로 지방. 버터를 선택하는데 빠질 수 없는 요소다. 지방 함유량이 높을수록 버터는 더 맛있다. 스위트 크림은 81~83%, 발효버터는 83~86% 사이이다. 5% 정도에서 버터의 맛이 갈린다는 의미인데, 수치까지 따져야 하는가라고 고민하기 전에 다행스럽게도 지역으로 경계선이 갈린다. 대체로 유럽 버터의 지방 함유량이 높다.
같은 요령을 한국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있다. 버터는 분명 낯선 재료도 아니고 국산도 존재하지만 (진심으로) 안타깝게도 그 영향력이 매우 약하다. 맛을 논하기 이전에 희귀하고, 가격도 딱히 싸지 않다(인터넷 최저가 기준 100g 당 2,266원, 이하 100g 기준). 대부분이 스위트 크림이며 맛의 개성도 없다. 그나마 색이 옅은 편에 속해 공예 수준의 케이크를 만드는 공방 등에서 버터크림에 쓴다고 하니 오히려 더 안타깝다. 그런 케이크의 세계에서는 가정에서 한두 덩이 먹는 수준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양을 한꺼번에 쓰는데 품질이 썩 좋지 않으면서도 가격은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 소비자라면 안타깝지만 국산 버터는 고려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시작해도 좋다. 이후로는 거의 백지에 가깝다. 지금까지 살펴본 분류와 요령에 따라 마음에 드는 것을 한 가지씩 골라 먹어보면서 마음에 드는 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날씨가 제법 쌀쌀해지면 열 개 든 스무 개든 대량 구매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막막할 독자를 위해 출발점을 가볍게 짚어 보자. 지방 함유량이 높은 유럽식의 발효 버터를 일단 선택한다. 대형 마트와 인터넷 오픈 마켓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덴마크산의 루어팍(1,800원)이 있다. 가격도 저렴한 편이지만 소금 함유량도 1.14%로 간도 맞고 맛도 훌륭하다. 그 밖에 프랑스산의 대표격인 이즈니(3,080원), 그보다 고급인 에쉬레(6,420원)가 있다. 가격대가 높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온ㆍ오프라인을 불문하고 유통기한이 임박한 제품을 할인하는 기회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냄새와 온도에 민감한 버터
버터는 지방이니만큼 보관과 사용에서 두 가지만 신경 써주면 된다. 첫 번째는 냄새다. 지방 함유량이 높은 식품은 냉동에 잘 버틴다. 따라서 버터도 할인 제품을 다량으로 구매해 냉동실에 1년(가염 버터에 해당, 무염 버터는 3개월)까지 두고 쓸 수 있다. 쓰기 전에 냉장실로 옮겨 해동시키면 되는데, 냄새를 흡수하지 않도록 랩이나 은박지를 씌우는 간단한 추가 조치를 하길 권한다. 냉장실에서도 유리로 된 밀폐용기에 담아 3주쯤은 두고 쓸 수 있다.
두 번째 고려해야 할 사항은 온도. 두 갈래로 생각해볼 수 있다. 잘 안 녹는 경우와 너무 잘 녹는 경우이다. 빵에 발라 먹기라도 할 때에는 잘 안 녹아서, 또 제과를 비롯한 요리에 쓸 때에는 너무 잘 녹아서 버터는 가끔 골치거리다. 각각의 상황에 대처 요령이 있다. 일단 잘 안 녹는 경우라면 표면적을 넓히는 게 도움이 된다. 나이프로 최대한 얇게 저며도 좋지만 요즘은 아예 딱딱한 버터를 먹을 만큼만 강판에 가는, 좀 더 적극적인 요령이 인기이다. 갈리는 순간까지는 딱딱하지만 나이프와 접촉하는 순간 빵에 매끄럽게 바를 수 있을 정도로 녹는다. 너무 잘 녹는 경우까지 감안해서 버터를 쓴다면 온도계를 갖추는 게 속 편하다. 제과에서는 흔히 ‘상온에 두어 부드러워진 버터’를 믹서로 ‘마요네즈와 비슷한 질감이 될 때까지’ 저어 공기를 불어 넣는다고 표현하는데, 온도계를 쓰면 훨씬 더 안심할 수 있다. 18~21℃가 제과에 쓰이는 버터의 최적 온도이다.
◇밥과 버터의 절묘한 조화
마지막으로 서양 재료인 버터의 한식 편입 맥락을 살펴보자. 지인이 귀띔해준 비법이 있다. ‘아이 친구들이 놀러 오면 김치 볶음밥을 해 주는데 인기의 비결은 에쉬레 버터’라는 것이다. 원래 맛있는 에쉬레 버터가 지방의 고소함 자체를 한 자락 깔아주는 것은 물론, 김치의 맛과 향 또한 확 살려주기 때문이다. 돼지기름에 김치를 구워 먹는 김치 삼겹살의 원리에서 지방만 대체한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튀김을 제외한 모든 기름을 쓰는 조리에 버터로 대체할 수 있는데, 모두가 좋아하는 ‘본연의 맛’을 즐기고 싶다면 갓 지은 밥과 가염 버터 단 둘의 짝짓기면 충분하다. 차가운 버터를 갓 지어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밥에 얹어 조금씩 녹여가며 비벼 떠 먹는다. 차가움과 뜨거움, 녹지 않은 버터와 녹은 버터의 맛과 질감 등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 흔히 간장 게장 같은 음식을 밥도둑이라 꼽지만, 버터는 오래 전부터 밥과의 만남을 한결 같이 기다려 왔다.
◇정제 버터의 세계
버터는 지방이 대부분에 나머지는 물, 그리고 소량의 단백질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20% 안쪽인 버터의 수분을 끓여 증발시키면 정수인 지방만 남으니, 이를 정제버터(clarified butter)라 부른다. 정제 버터는 삶은 게나 바닷가재 등을 찍어 먹는 소스의 역할도 하지만, 일반 버터를 쓰는 조리의 모든 자리에 대체할 수 있다. 한편 삼보의 원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도의 기는 정제버터에 속하지만 조금 다르다. 수분을 날리는, 즉 정제 과정을 거친 뒤에 좀 더 끓여 유당의 캐러멜화 과정을 거치므로 맛이 복잡하다. 종교에 바탕을 둔 채식 문화를 지닌 인도에서 맛과 풍부함을 덧씌우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맛을 보고 싶다면 백화점 식품 코너 혹은 아이허브 같은 직접 구매 사이트에서 살 수 있다.
※ 이용재 음식평론가가 토요일 격주로 식재료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실은 아무도 몰랐던, 식재료를 제대로 대하는 법을 통해 음식의 기본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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