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니요 인터뷰] _ 인터뷰에서 ‘아니요’를 찾아보세요. 크고 작은 ‘아니요’로 자신의 오늘을 바꾼 사람들을 만나 봅니다.
김기중씨는 25년차 인테리어 디자이너다. 한남동 디뮤지엄, 오래된 당구장이 매력적 전시공간으로 재탄생한 ‘구슬모아 당구장’, 의류 브랜드H&M의 매장 등 굵직한 프로젝트들이 그의 손을 거쳐갔다. 그러나 마포구 연남동의 3층짜리 단독주택을 개조한 ‘피팅룸 연남’(이하 피팅룸)에서 그는 발라드 가수가 된다. 예명은 고인돌. “아무도 모르게 5집까지 냈다”는 그는 “사실 인테리어보다 음악이 더 좋다”고 한다.
조경 디자이너 유승종씨 역시 라이브스케이프라는 조경 디자인회사의 대표지만 피팅룸에선 식물 실험실 ‘초식’의 주인장이다. 실험이라 해도 피팅룸의 작은 마당에 딸린 텃밭에 물을 주고 창포나 거봉, 무화과를 심어 가꾸는 게 전부. 그러나 어느 조경 디자이너도 하지 못하는 것, 즉 조경을 일이 아닌 취미로 대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본업의 가면을 벗고 취미의 맨 얼굴을 드러내는 곳, 피팅룸은 대체 어떤 곳일까. 피팅룸을 기획한 이는 건축브랜딩 회사 핏 플레이스의 대표 이호씨다. 그 역시 피팅룸에선 작은 카페의 주인이다. 연남동의 가느다란 골목 중 하나에 자리한 오래된 단독주택을 개조해 지난 3월 피팅룸의 문을 열었다. 이 대표는 이곳의 정체성을 ‘사이드B’라고 설명한다.
“옛날 LP판 보면 사이드A엔 시장에 팔릴만한 곡을 넣고 사이드B엔 뮤지션 본인이 하고 싶은 15분짜리 연주곡 같은 걸 넣고 그랬거든요. 피팅룸은 사이드B 같은 곳이에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여기 모여서 각자 본업보다 더 좋아하는 딴짓을 하는 거죠.”
◇ “혹시 알아요? 인테리어하다 가수 될지..”
피팅룸에 입점된 가게는 총 5곳. 1층엔 이호 대표가 운영하는 카페와 유승종 대표의 실험실 ‘초식’, 가수 고인돌(김기중)의 음악 작업실, 디자이너 구옥금씨의 모자 가게 ‘제이드골드나인’이 있다. 지하는 작곡 프로듀서팀 ‘아루&폴’의 녹음실이자 작업실이다. 2층은 이호 대표의 집, 3층은 핏플레이스 사무실이다.
이호 대표에 따르면 피팅룸은 “인생의 하프타임을 지나고 있는” 남자 3명의 질문에서 시작됐다. “(김기중, 유승종씨) 모두 일하면서 만난 사이에요. 마흔 중후반으로 나이도 비슷해요. 각자 큰 회사에서 인지도 있는 프로젝트들을 맡다가 마흔 중반이 넘어가니 삶을 돌아보게 되더군요. ‘이게 나랑 맞나? 정말 내가 원하는 인생이야?’란 의문이 들기 시작한 거죠.”
피팅룸이란 이름은 ‘나에게 맞는 것’을 찾아나간다는 뜻에서 나왔다. 20대부터 50대까지, 대학생부터 회사 대표까지, 통상 한자리에서 보기 어려운 조합이지만 이곳에선 저마다 열정적인 취미를 가진 개인일 뿐이다. 각자 유치원 동창, 고향 친구 등으로 얽혀 피팅룸에 발을 디딘 이들은 오래된 주택의 방 한 칸씩을 차지하고 앉아 자신만의 딴짓에 골몰한다.
방세는 균일가 30만원. 1층의 모든 방은 카페 손님에게도 열려 있다. 즉 카페에 온 손님들이 고인돌의 작업실이나 모자가게 제이드골드나인에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곳 모자가게의 주인은 ‘모자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인 구옥금씨이다. 핏플레이스의 직원 류혜성 디자이너가 고향 친구라서 이곳에 연결됐다. “평일엔 직장 때문에 자리를 비우기 때문에 여긴 무인매장으로 운영해요. 카페에 온 손님들은 편하게 모자를 써보고, 결제는 카페 카운터에서 도와주세요. 모자 회사를 다니면서 늘 저만의 디자인에 대한 갈구가 있었는데 그게 여기서 조금 해소되는 것 같아요.”
커피를 내리다가 모자 값을 계산하고 식물을 돌보다가 커피를 내리며 서로 딴 가게 일을 해주는 것은 피팅룸 사람들에게 익숙하다. 공간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최근 유행하는 코-워킹(co-working) 스페이스, 코-리빙(co-living) 스페이스와 비슷한 개념일까?
“아니요. 피팅룸의 핵심은 생계가 아닌 다른 짓을 해보는 거예요. ‘코-딴짓 스페이스’나 ‘코-취미 스페이스’가 더 정확하겠네요. 딴짓이 주는 힘이란 게 있잖아요. 혹시 알아요? 인테리어 하다가 가수가 될지…. 그런 여지를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즐거워지죠.” (이호)
◇ 함께 모여 딴짓을 하다, 코-딴짓 스페이스
딴짓을 할 때 발휘되는 설명 불가한 힘은 시험 기간에 방 청소를 해본 이라면 누구나 안다. 일련의 에너지는 결국 또 다른 폭발적인 에너지를 끌어 모으게 마련이다. 인생의 절반을 통과한 중년들의 고민에서 출발했지만 현재 피팅룸에 모인 이들은 대부분 20, 30대다.
김기중씨의 음악을 녹음해준 인연으로 입주한 아루&폴은 여기서 유일하게 본업인 음악을 하는 이들이다. 그들이 온 후 피팅룸은 뮤지션들의 아지트 역할도 겸하고 있다. 아루씨는 “여기 들어온 뒤부터 음악을 ‘한땀한땀’ 작업하고 있다”고 했다.
“음악하는 사람들은 트렌드에 빨리 반응할 수 밖에 없어요. 해외에서 유행하는 걸 재빨리 가져와 자기가 만든 것처럼 하는 행위도 만연하죠. 피팅룸에 온 후 우리에게 맞는 음악이 무엇인가 하는 고민이 커지면서 사이클이 많이 느려졌어요. 트렌드에 맞지 않더라도요. 자기에게 맞는 걸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는 점에서 여긴 아주 특별한 공간이에요.”
누구나 자신의 땅굴을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곳. 이들은 딴짓을 하면서 자신의 속도, 힘, 호오, 생김, 본질을 섬세하게 마주한다. “취미가 오히려 본업보다 개인의 본질에 더 가까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살다 보면 일 때문에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일들이 생기잖아요. 그럴 때 쉼표를 찍을 수 있는 곳,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물을 수 있는 곳, 피팅룸은 그런 곳이에요” (이호)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김가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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