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위원회는 파격보다 안정, 정치보다 인권을 택했다. 한반도 대화 국면의 훈풍을 타고 문재인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수상 가능성이 유력하게 점쳐지면서 한껏 달라 올랐던 올해 노벨 평화상은 결국 콩고민주공화국(민주콩고) 의사 드니 무퀘게와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의 성폭력 만행을 고발한 여성운동가 나디아 무라드의 품에 안겼다.
산부인과 의사인 무퀘게는 ‘성폭행 피해 여성의 천사’로 통한다. 1999년 병원을 설립해 지난 20여 년간 내전에 시달리는 민주콩고에서 능욕 당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여성 수만 명을 치료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도록 돕는데 헌신해왔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 서울평화상, 2014년 사하로프상을 받았고 2016년 미 경제전문지 포천이 선정한 세계의 위대한 리더 50인에 올랐다.
그는 서울평화상 수상소감에서 “강간과 성폭력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오랫동안 이용되어왔고, 전시는 물론 평화 속에서조차 행해졌다”며 온갖 성폭력을 극복한 생존자 여러분, 그리고 평화를 추구하는 소망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힘든 시련을 견뎌낸 분들에게 이 상을 바친다”고 밝혔다.
나디아 무라드는 이라크의 소수민족인 야지디족 출신으로 19살이던 2014년 8월 IS에 납치돼 탈출하기까지 3년간 성노예로 살았다. 당시 IS 주둔지인 모술에는 여성과 아이 6,000여 명이 붙잡혀있었다. 그는 탈출 후 같은 해 12월 유엔 안보리 연설에서 “그들은 우리를 모욕하고 더럽혔다"며 “그들은 내가 졸도할 때까지 성폭력을 가했다"고 증언했다. 이어 “제발 IS를 완전히 제거해달라"며 국제사회의 응징을 촉구했다.
노벨 위원회의 이번 수상자 결정은 아직 비핵화의 뚜렷한 성과가 없다는 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4일(현지시간) “핵ㆍ미사일 실험을 중단하고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을 불게 한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노력을 노벨 위원회가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남북 정상의 공동 수상 가능성에 잔뜩 무게를 실었지만 끝내 무산됐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임에도 기대에 비해 구체적인 비핵화 프로세스가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이다.
앞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09년 중동 평화 이니셔티브를 발표한 것만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당시 노벨 위원회는 “평화상 수상으로 오바마 대통령이 추진하는 중동평화를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지만, 중동 정세는 더 혼돈에 빠졌다. 이 같은 학습효과로 노벨 위원회가 또다시 모험을 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 일정상 이미 지난 1월 말 후보 접수가 마감돼 이후 펼쳐진 한반도 해빙 무드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측면도 적지 않다. 노벨 평화상 심사에는 216명의 개인과 115곳의 단체 등 총 331개의 후보가 경합했다.
더구나 북한의 열악한 인권상황을 외면한 채 선뜻 김 위원장의 손을 들기에는 부담이 큰 상황이었다. 비핵화 대화에도 불구하고 “김 위원장이 고문과 기아, 처형 등 인도에 반하는 범죄를 광범위하게 자행했다”는 유엔의 평가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1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아웅산 수치 여사의 경우, 미얀마 정부의 로힝야 족 학살을 방관하며 노벨상의 명성에 먹칠을 한 탓에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으며 수상 박탈 여론이 끊이지 않고 있다. 노벨 위원회가 김 위원장을 선택한다면 또다시 논란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다.
김광수 기자 rolling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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