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취업을 준비 중인 학생이에요. 몸에 이상이 생긴 건 10년 전부터였어요. 대학에 입학했는데 원하는 곳이 아니어서 재수를 선택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난독증이 생겼어요. 몸에 알레르기 반응도 왔고요. 너무 힘들어서 부모님한테 얘길 했는데 엄마가 자초지종도 물어보지 않고 “네가 정신병자니? 병원 다니면 보험 가입할 때 문제 생기는 데 어떻게 하려고 그래?”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아빠가 병원에 같이 가주긴 했지만 어떤 위로의 말도 듣질 못했어요. 제가 유난스럽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 이후로 성인이 됐지만 다른 사람들과 관계에 문제가 많이 생겼어요. 낯선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눈 마주치는 것이 너무 힘들고 ‘저 사람이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생각이 들어 피하게 됩니다. 어떨 때는 대화를 하다가 저도 모르게 몸이 굳어버리기도 해요.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얘집니다. 심지어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계산할 때도 떨리고 불안합니다. 갑자기 화도 나고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우면 ‘이 사람이 나를 싫어하나’ ‘뒤에서 나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이 돌지 않을까’하는 불안한 상상이 들어요. 남자친구를 사귀기도 했는데 잘 안 맞아서 헤어졌어요. 저는 오래 같이 있기를 원했지만 그는 혼자 있길 더 원했고 그 과정에서 저는 외로움이 더 커졌어요. 결국 싸우고 헤어졌죠. 지금 다른 남자친구를 3년째 만나고 있지만 마음 속의 불안감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어요. 같이 있어도 진심으로 위로를 받는 느낌이 안 들어요.
저는 어릴 적에 대화가 없는 가정환경에서 자랐어요. 평소에 과묵한 아빠는 밥 투정하는 저의 머리채를 잡고 먹지 말라며 바닥에 끌어내려 방에 가둘 정도로 순간 욱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 커서도 아빠가 갑자기 공격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곤 했습니다. 그러다가도 제가 아플 때 걱정을 해주기도 하고, 기분이 좋을 때면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화를 잘 내는 아빠에 비해 엄마는 얌전했어요. 제 기억에 엄마도 아빠가 언제 화를 낼까 늘 불안해하면서 말없이 집안일만 했습니다. 아빠한테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엄마는 저한테 유독 차갑고 매정했어요. 저한테 힘든 일이 생겨도 제 편을 들어주기보다 늘 저를 탓했어요. 유치원에 다닐 때 동네 친구가 저를 따돌렸을 때 엄마는 오히려 제가 문제라며 나무랐어요. 친척들에게 “쟤는 몸무게가 나보다 더 많이 나가. 돼지 같아”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기도 했어요. 엄마와 크게 싸운 후 미역국을 끓여드렸을 때도 엄마는 엄마 친구에게 “말은 안 들으면서 미역국 끓여오는 게 너무 어이없다”며 제 험담을 했습니다. 그런 엄마가 미워서 엄마와 많이 싸웠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어요. 엄마는 차갑고 거친 돌멩이 같아요. 재수할 때도 엄마가 친척들에게 “쟤는 (대학입시) 안 된다. 떨어질 거야”라고 말하는 걸 듣고 충격을 먹고 밤새 운 적도 있어요. 엄마에게 “그렇게 쉽게 얘기 하지 마세요”라고 하면 엄마는 “이미 지난 일인데 조용히 해”라며 입을 닫아버립니다.
이제 취업도 해야 하고, 결혼도 꿈꾸고 싶은데 저는 어디서부터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과 잘 지내고 싶은데 이유 없이 불안합니다.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도 늘 제가 매달리는 것 같아 자존감이 떨어집니다. 부모님과 갈등을 해결해야 제가 다른 사람과도 잘 지낼 수 있는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김지수(가명ㆍ29세ㆍ취업준비생)
지수씨, 일단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다른 이에게 꺼내놓기 힘든 이야기를 만나지도 않은 제게 털어놔줘서 고맙습니다. 진심으로요. 사연을 듣고 당신의 인생을 다 알았다고는 감히 얘기할 순 없지만 지수씨가 살아온 나날의 중요한 부분에 대해 많은 이해가 됐어요. 저는 그래서 당신의 삶에 마음이 몹시 아팠어요.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아야 하는 시기에 지수씨는 부모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질 못했어요. 그러나 그것은 지수씨 탓이 아니에요. 지수씨 부모가 부모로써 응당 줬어야 할 애정을 주질 못했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어긋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잘 유지해왔어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지수씨는 훌륭하고, 내적인 힘이 큰 사람일 거에요.
부모는 자식에게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모는 자식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자식을 사랑합니다. 지수씨 부모도 지수씨를 사랑할겁니다. 하지만 조건 없이 그 사랑을 잘 표현해서 자식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도록 성숙한 방법으로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기본적인 의식주를 충족시켜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서적으로 따뜻한 위로와 애정을 줘야 하지요. 부모는 자식에게 ‘네가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네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라는 메시지를 줘야 해요. 왜냐하면 유년기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부모이고, 가장 가까운 사람이 위로와 의지가 되기 때문이죠. 이 역할이 부모가 해줘야 하는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역할이자 의무입니다. 이런 사랑을 저는 ‘정서적 밥’이라고 표현합니다. 밥을 먹어서 포만감을 느끼고 영양을 공급받고 성장하듯이 ‘정서적 밥’을 먹고 안정감을 느끼고 편안해지고 그 과정에서 자존감도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지수씨의 부모는 그렇지 못했어요. 사랑했지만 표현하지 않았어요. 사랑했지만 미성숙한 사람들이었어요. 아빠는 어떤 사람일까요. 아마도 예측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을 거에요. 갑자기 화를 내거나 욱했어요. 언제 화를 낼지 예측할 수 없어 지수씨에게 아빠는 늘 두려운 존재였을 거에요. 차라리 늘 화를 내거나 무뚝뚝했다면 지수씨가 대처할 수 있었겠지만, 아빠는 기분에 따라 지수씨에게 화를 내고 공격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거에요. 엄마도 지수씨를 공격했어요. 엄마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거나 이를 배려하는데 굉장히 무지한 사람이에요. 지수씨를 비난하고, 지적하고, 모욕을 줬어요. 엄마가 지수씨를 대한 방식도 정서적 공격이지요. 아픈 딸에게 보험가입을 운운하는 부모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런 행동은 부모로서 해서는 안될 행동이에요. 그렇다면 지수씨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엄마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까요. 아니에요. 지수씨가 아닌 다른 딸이었어도 엄마는 똑같이 모욕을 주고 공격을 했을 거에요. 지수씨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엄마가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이건 100% 엄마의 문제에요. 상대방이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불편할지 한번도 생각 안 해봤을 거에요. 남편으로부터 존중 받지 못하고 척박하게 살아온 자신의 환경 등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인 방법, 즉 남편이나 딸의 흉을 보는 것으로 푸는 겁니다. 그래요, 지수씨의 부모는 둘 다 지수씨에게 너무 공격적이었어요. 세상에서 나를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 공격을 가했으니, 지수씨는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지 충분히 이해합니다.
공격적인 부모와의 관계가 지수씨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느끼는 불안의 원인일 겁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당해 의지할 곳 없이 홀로 감당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다시 한번 가슴이 저려옵니다. 다른 이에게 다가가기가 힘들고, 그래서 본인은 더 외로워지는 그런 상황을 감내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에요. 그런데도 지수씨는 엇나가지 않고, 부모에 반항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왔어요.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 재수를 선택해서 열심히 했어요. 부모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엉뚱한 짓을 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파국으로 몰고 가지도 않았어요. 너무 대견하고 잘했습니다.
지수씨는 지금 당신이 원하는 인생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어요. 당신의 내면의 힘을 믿어 보세요. 그 힘이야말로 지수씨의 인생에 가장 필요한 동력원이고, 그걸 당신은 이미 갖고 있어요. 놓치지 말고 더 키워가야 해요. 말처럼 쉽지 않죠. 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해내야 합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실질적 조언은 매일매일 감정일기를 한번 써보라는 거에요. 예컨대 남자친구 반응이 뭐 때문에 불편한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이 어떤 점이 힘든지를 하루하루 묘사하고 자신의 감정에 점수를 매겨봐요. 그리고 며칠 지나 일기를 다시 보세요. 분명 그 당시와 다르게 느껴질 겁니다. ‘내가 그때 왜 그렇게 느꼈지?’, ‘너무 감정적으로 받아들인 건 아닐까?’, ‘이 점은 지금 돌이켜보니 불편했을 텐데 잘 견뎠네’ 등등 다양한 감정과 생각이 들 거에요. 자기를 한발 물러 서서 바라볼 필요가 있어요.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는 나의 불안과 그것을 객관적으로 풀어내 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거든요. 뭐가 다른지 교정된 감정과 생각도 적어보고요. 한발 더 나아가 지수씨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의논해 줄 조력자(의사)를 만나볼 것도 권합니다. 당장은 지수씨 혼자 아무리 노력해도 불안이 쉬 가시지 않을 거에요. 다른 사람이 전혀 지수씨를 공격할 마음이 없는데 그렇게 느낀다면, 이를 알려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건 남자친구나 가족이나 혹은 대화 당사자가 해줄 수 없어요.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상황을 판단해줄 조력자와 같이해야 합니다. 지수씨가 하는 행동, 하는 말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게 전혀 아니고, 반대로 다른 사람도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줄 겁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고, 마음의 문을 열어가야 합니다.
지수씨, 당신의 부모에게 사랑과 이해를 바라기에는 안타깝지만, 힘들 거에요. 성인이 됐으니 부모의 미성숙한 사랑에 대해 고통스러워 하기보다 자신의 삶을 창조적으로 살아갈 동력을 기르는 게 더 중요해요. 객관적으로 부모를 바라보고, 그들로부터 지수씨를 분리해야 합니다. 단지 부모를 이해하는 수준에 멈추는 게 아니라 엄마 아빠가 아닌 각각 한 명의 인간으로 부모를 바라보고, 그들의 인생에서 지수씨를 분리해야 합니다. “우리 엄마인데 안 볼 수도 없고 어떻게 해요?”라는 생각보다 “우리 엄마는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어서 미성숙한 사랑을 줬지만, 나는 그렇게 살지 않을 거고, 성숙한 인간으로서 발전하겠다”는 생각을 가지는 게 필요합니다. 제가 보기에 지수씨는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보편적인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 겁니다. 그렇게 믿고 꿋꿋이 자신의 삶을 살아내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지수씨라면 잘할 수 있을 겁니다.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지면을 통해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신청해 보세요. 사연은 한국일보 사이트(http://interview.hankookilbo.com/store/advice.zip)에서 상담신청서를 내려 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에 소개됩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