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가 자신의 작품이 소더비 경매에서 104만파운드에 낙찰되자 원격으로 작품을 분쇄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여 논란이 일고 있다. 경매사 소더비도 당황한 것처럼 보이지만 뱅크시의 새 ‘작품’을 열렬히 홍보하는 면모도 엿보인다. 일각에서는 소더비와 뱅크시가 공모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소더비 런던은 5일(현지시간) 현대미술 저녁 경매에서 마지막 작품으로 뱅크시의 ‘풍선과 소녀(Girl With Balloon)’를 경매에 부쳤고, 작품은 104만2,000파운드(약 140만달러)에 낙찰됐다. 그런데 작품이 팔리고 잠시 후, 작품을 설치한 액자 속에 숨겨 놓은 자동 분쇄기가 작품을 여러 조각으로 분쇄하기 시작했다.
뱅크시는 이튿날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분쇄기 제작 과정을 공개하며 이 퍼포먼스가 자신이 행한 것임을 ‘인증’했다. 아래에는 파블로 피카소를 인용, ‘파괴에 대한 욕구는 곧 창조적 욕구다. 피카소‘라고 적었다. 뱅크시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이미 수 년 전에 작품 액자에 분쇄기를 설치했으며 이 작품이 경매에 오를 것을 기다려 ‘자폭’을 저질렀다. 하지만 분쇄기가 어떤 원리로 작동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과거에도 미술시장 풍자한 뱅크시
소더비 유럽지부의 알렉스 브랑치크 수석이사는 “우리는 ‘뱅크시’당했다(Banksy’ed)”라며 “작가의 경매 기록을 달성한 작품이 즉각 분쇄되는 건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다. 이게 경매에 의미하는 바를 고민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소더비는 공식 성명에서 “기대하지 않은 이 사건은 미술 세계사에 한 장면으로 남게 됐다”라고 주장했다.
뱅크시의 의도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지만, 그간 뱅크시가 미술시장에서 자신의 작품이 고가로 거래되는 데에 불만을 표시한 바 있어 이번에도 미술시장을 의도적으로 풍자했다는 분석이 많다. 뱅크시는 통상 미술시장에서 3만1,000달러로 거래되는 자신의 작품을 2013년 뉴욕 거리에서 60달러에 판매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는데, 7시간 동안 손님 3명만이 8점을 사 갔다.
앞서 2007년에는 ‘너희 멍청이들이 진짜로 이 똥을 사는 걸 믿을 수가 없다’라는 제목의 작품에, 이 문장이 적힌 캔버스가 경매장에서 거래되는 모습을 그렸다. 역설적으로 이 그림조차도 2점이 소더비에서 거래됐다. 이번 그림도 비슷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브랜들러 갤러리의 운영자 존 브랜들러는 영국 BBC방송에 “뱅크시는 궁극의 홍보 예술가”라며 “작품이 유명해질수록 작품 가격도 더 비싸질 것”이라고 말했다.
◇‘자폭 쇼’ 알고도 모른 척?
하지만 사건에 대한 반응이 마냥 우호적이진 않다. 우선 소더비가 작품의 이름값을 올리기 위해 이번 ‘자폭’을 기획했거나 최소한 뱅크시의 행동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의심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는 의심의 근거로 ▲작품이 경매 중에도 행사장 연단에 올라오지 않고 계속 벽에만 매달려 있었다는 점 ▲이 작품의 경매가 마지막에 이뤄졌다는 점 ▲경매사가 액자를 점검해 내부 장치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는 점 등을 들었다.
투자 컨설팅업체 ‘파인아트그룹’의 미술 투자부문 대표 모건 롱은 뉴욕타임스에 “건물 안에 의심스런 사람을 들여보낸 것은 소더비다. (사건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과거 뱅크시의 대리인으로 12년간 일한 미술상 스티브 래저리디스는 미술 전문 매거진 아트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뱅크시는 어떤 조직과도 공모하지 않는다. 그건 뱅크시 스타일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작품이 실질적으로 ‘망가진’ 상황에서 경매 역시 성립하지 않게 됐다는 주장도 있다. 경매 낙찰 선언에 계약이 성립하는지, 아니면 거래가 완료된 후에 계약이 유효한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소더비는 “낙찰자와 대화 중이다. 차후 조치를 논의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낙찰자는 현장에 오지 않고 전화로 경매에 참여했으며 신원은 공개되지 않았다.
뱅크시는 2002년 런던의 한 인쇄점 벽에 처음으로 ‘풍선과 소녀’를 그렸으며, 판지에 인쇄한 같은 그림이 7만파운드에 팔리기도 했다. 벽면에 있는 원작도 나중에 떼여 따로 전시된 후 판매됐다. BBC에 따르면 ‘풍선과 소녀’는 2017년 영국인 2,0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국 현대미술작품으로 꼽혔다. 이번에 경매된 ‘풍선과 소녀’는 캔버스에 스프레이페인트와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것이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