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입대한 특수전사령부(특전사) 요원 A(23)씨는 그 해 11월 처음으로 참여한 ‘천리행군’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해발 1,200m가 넘는 강원도의 산악 지역 등을 8박9일 동안 400㎞ 넘게 걷고, 밤에는 텐트를 치고 야영하는 훈련이었다. 신참이었던 A씨는 군에서 보급받은 방한점퍼와 침낭을 가져갔다. 하지만 행군 후 땀이 식고 추위가 몰려오자 선임들은 모두 개인 구매한 기능성 점퍼를 꺼내 입었고, 잘 때도 각자 준비한 거위털 침낭을 폈다. 팀원 11명 중 보급 점퍼와 침낭을 가져온 건 A씨 뿐이었다.
곧 이유를 알게 됐다. 고어텍스 재질로 된 보급 방한복은 아무리 내피를 껴입어도 뼛속까지 추위가 스며들었고, ‘4계절용’으로 개발된 보급 침낭은 겨울에는 아예 쓸 수 없을 정도로 얇아 다른 요원들은 봄과 여름에만 사용했다. A씨의 상황을 알게 된 선임들은 “그렇게 자면 얼어 죽는다”고 걱정했다. 결국 팀원들이 핫팩을 모아줘 A씨는 침낭 속에 핫팩 11개를 넣은 채 밤새 추위와 싸웠다.
다른 요원들이 개인적으로 구매한 물품, 이른바 ‘사제 장비’는 방한용품뿐만이 아니었다. 팀원 대부분이 보급 조끼 대신 상용 조끼를 입었고, 절반은 군장도 직접 사서 썼다. A씨는 “보급 장비는 성능이 떨어지거나 너무 불편해 훈련을 제대로 받기 힘든 수준”이라며 “지금까지 150여만원을 들여 전투화 2켤레, 조끼, 침낭, 점퍼 등을 샀다”고 말했다.
◇ 10명 중 9명은 전투화, 5명은 방탄조끼 사서 쓴다
한반도 유사시 적진에 침투해 작전을 벌이는 최정예부대인 특전사 요원들의 사제 장비 사용은 일반화돼 있다. 사제 장비를 한 품목도 쓰지 않는 요원은 1명도 없을 만큼 넓게 퍼져있다. 특전사 관계자들에 따르면, 보통 12명 정도인 한 팀 기준으로 요원의 90% 이상이 전투화, 장갑, 침낭, 기능성 방한복 등을 보급 장비 대신 사제 장비로 쓰고 있다. 방탄 조끼는 요원의 50%, 방탄 헬멧, 군장은 30%가 넘는 요원들이 사서 쓴다. 정확한 사격을 위해 야간표적지시기, 조준경 등을 구입하거나, 전투력 평가나 유사시에 대비해 탄창을 사놓는 요원도 있다. 보급 탄창은 불량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몸에 장비를 착용하는 각종 전술 파우치부터 낙하산에 이르기까지 2,000만원 상당의 사제 장비를 구입한 요원도 있을 정도다.
이처럼 사제 장비가 널리 퍼져있는 것은 보급 장비 수준이 열악하기 때문이라는 게 특전사 요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적진에서 게릴라 작전을 펼치는 특전사 요원들은 장비가 개인의 전투력과 생명을 좌우하지만, 장비 수준은 198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많다.
많은 요원들이 불편함을 호소하는 대표적인 장비는 헬멧이다. 보급 헬멧은 이동 중 사격은 물론, 제자리에 멈춰 사격할 때조차 무게가 앞으로 쏠려 시야를 가린다고 한다. 이에 요원들은 이마가 다 드러날 만큼 헬멧을 뒤로 젖힌 채 사격을 하거나,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헬멧 외피를 벗겨내기도 한다. 또 야간 침투 작전을 벌이는 특전사는 헬멧에 야간감시장비를 부착하는데, 이럴 경우 장비 무게를 견디지 못한 헬멧이 앞으로 더 쏠린다. 머리를 보호하고 임무 수행을 도와야 할 헬멧이 오히려 요원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다. 특전사 요원 B(25)씨는 “보급 헬멧은 6ㆍ25 전쟁 당시 썼다고 해도 믿을 만큼 낙후돼 있다”며 “인터넷에서 30만원에 구입한 상용 헬멧은 시야를 가리지 않고 머리도 아프지 않아 좋다”고 말했다.
보급 전투화는 요원 대부분이 관물대에 보관해두거나 부대 안에서만 신는다고 한다. 행군 때 하루만 신어도 발에 물집이 잡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요원들은 발이 편하고 발목을 안정적으로 지지해주는 상용 전투화를 사서 신는다. 권총, 대검 등 장비를 매달아야 하는 조끼 역시 보급품은 필수 장비만 장착해도 축 늘어져 뒷목을 심하게 짓누른다고 한다. 사용한 지 수 십 년이 돼 망가지거나 폐기해야 할 장비를 테이프로 붙이거나 바느질 해 계속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 사제 장비 허용 vs 금지, 지휘관마다 달라 혼란
요원들은 효율적인 임무수행을 위해 사제 장비를 사용해왔지만, 허용 여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어 혼란이 계속돼 왔다. 2013~15년 재직한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은 임기 중 사제 장비는 물론, 사격 명중률을 높이는 신축식 개머리판 등 사제품을 총기에 장착하는 것까지도 허용했다. 하지만 사제 장비가 장병들의 통일성을 해치고,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금지한 지휘관들도 있었다. 그럴 때는 사제장비를 숨겨놓고 몰래 써야 했다. 지금도 명확한 기준 없이 대대나 지휘관마다 사제장비 허용에 대한 판단이 달라 요원들의 불만이 높다. 특전사 요원 C(24)씨는 “현재는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사제장비가 있으면 지휘관들이 바로 통제하고 있어, 낙후된 보급 장비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 첨단 장비 ‘워리어 플랫폼’ 보급도 반신반의
이 같은 현실을 반영해 육군은 지금까지 구매해 쓰는 사제 장비 중 성능과 안전성이 검증된 장비 사용을 내년부터 허용하기로 했다. 또 장병의 전투피복ㆍ장구와 전투 장비를 첨단소재와 최신 기술로 개선한 ‘워리어 플랫폼’을 1만여명 규모인 특전사에 가장 먼저 보급할 예정이다. 전투복, 전투화, 방탄복, 방탄헬멧, 수통, 조준경, 소총 등 33종 전투 피복과 전투 장비로 구성되는 워리어플랫폼은 장병들의 생존성과 전투 효율성을 크게 높여준다는 게 육군의 설명이다.
육군 관계자는 “내년 하반기부터 특전사에 워리어 플랫폼 보급을 시작해 2020년까지 완료할 계획”이라며 “우수한 제품을 보급하면 사제 장비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특전사 내에는 워리어 플랫폼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보급 장비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 때문이다. 특전사 요원 C씨는 “워리어 플랫폼이 성공하려면 현장 임무 수행 요원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야 하는데, 그럴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남보라 기자 rarara@hankookilbo.com
권용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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