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ㆍ13 부동산 대책 발표 후 거래량이 3분의 1로 줄었지만 가격은 오히려 조금씩 오르고 있다. 아파트값이 급등하던 지난 8월 자금도 없으면서 어떻게든 투자하려 몰려든 사람들은 다 빠지고, 이젠 20억원 이상 감당이 가능한 강남의 현금 알부자 등 실수요자의 매매 시도만 이어지고 있다.”
1970년대 중반 서울 용산구 이촌동에 아파트가 들어설 때부터 영업을 해 온 ‘터줏대감’ A부동산 중개사무소 대표는 11일 점심 시간 무렵 느긋하게 사무실 문을 열었다. 지방 투자자들까지 몰린 지난 여름에는 이른 아침부터 부산을 떨고도 별다른 중개 수익을 얻지 못했지만, 9ㆍ13 대책 이후엔 수십억원대 자산가들만의 확실한 거래만 중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집주인들은 매매가격을 조금씩 올릴지언정 낮추지 않고 있고, 대출 규제와 무관한 자산자들은 언제든 그 물건을 사려고 덤벼든다“며 “여긴 이제 ‘부자, 그들만의 세상’이 됐다”고 말했다.
지난 7월 박원순 서울시장의 용산ㆍ여의도 통합 개발 발표 이후 집값 상승세에 기름을 끼얹은 서울 용산구는 정부의 9ㆍ13 대책을 촉발한 진앙지 중 한 곳이다. 하지만 9ㆍ13 대책 발표 한 달이 되면서 용산 부동산 시장의 철옹성은 오히려 더 공고해지는 분위기다. 실제로 이날 한국감정원의 10월2주(8일 기준) 아파트값 변동률에 따르면 용산구 아파트값은 전주 대비 0.05% 상승했다. 지난달초 0.40%까지 치솟았던 주간 상승률의 10분의1에도 못 미치는 0.03%(10월1주)까지 떨어진 상승 폭이 다시 반등하는 모양새다. 용산은 서울 25개 구 중 처음으로 올해 아파트값 누적 상승률이 이미 10%도 돌파했다.
용산의 질주는 기본적으로 입지 조건이 우수한데다가 장기 개발호재가 풍부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한강 조망권을 가진 용산은 용산가족공원과 중앙국립박물관 등 녹지가 풍부하고 남산터널ㆍ한남대교 등을 통해 도심과 강남으로 접근하기도 용이하다. 이전이 확정된 미군기지 부지(243만㎡)와 용산 철도기지창(37만2,000㎡) 등의 대규모 개발도 예정돼 있다. 서빙고동의 B부동산 대표는 “9ㆍ13 대책 이후 용산으로 몰려드는 자산가의 80%는 강남주민”이라며 “정부의 집중 규제로 피로도가 높은 이들이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하고 장기 개발 가능성이 큰 용산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강대교 인근의 C부동산 대표도 “용산 1세대 아파트인 현대맨숀(1974년 입주)이 내년 고급 리모델링(수평증축)에 들어가고, 서빙고동 신동아 아파트 등도 재건축에 속도를 내는 등 단기 호재도 있어 정부 정책과 무관하게 한동안 용산의 집값은 계속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용산역 인근의 D부동산 사무소 실장은 “이촌동과 달리 용산역 인근의 작은 평수 새 아파트는 10억원대 매물도 나오고 있다”며 “다만 집주인들이 대출을 끼고 집을 사려는 매수자는 아예 꺼리고 있어 10억 원 이상 현금이 있어야 매물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용산과 달리 서울 아파트값은 9ㆍ13 대책의 여파로 5주 연속 상승세가 둔화되는 모습이다. 이번주 서울 아파트값 상승률은 전주 대비 0.02%포인트 내린 0.07%에 그쳤다. 6월 셋째 주 이후 4개월 만이다. 함영진 직방 빅데이터랩장은 “9ㆍ13 대책이 대출 규제 등으로 달아오른 집값을 전반적으로 진화하긴 했지만 정상적인 주택 거래를 감소시키면서 지역 간 양극화만 심화시킨 측면도 있다”며 “규제로만 시장에 접근할 것이 아니라 서울 강ㆍ남북의 균형을 맞추거나 2기 신도시 등의 자족기능과 교통망을 확충하는 등 기본적으로 살기 좋은 환경을 균일하게 만들려는 정부의 사고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재호 기자 next8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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