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학과 연구기관의 연구비 운영 방식은 국내 기초과학 연구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그렇다고 명쾌하게 해결된 적은 없다. 말 그대로 해묵은 논의다. 그만큼 연구비를 지급하는 쪽과 사용하는 쪽 사이에 간극은 크다. 다만 양쪽이 모두 인정하는 사실은 “연구비의 비정상적 집행 문제는 대단히 민감하고, 은밀하고, 또 조심스러운 문제여서 과학계에 있는 많은 사람이 이를 다루길 꺼린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더 이상 수면 아래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 역시 다수 연구자의 목소리다. “교수사회에는 핵심 권력층이 형성돼있어 문제가 드러나면 조용히 넘어가려 하고 교수들이 타격을 덜 받는 방향의 해결책을 제시해왔고, 이 때문에 오랜 기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불법 알면서 풀링할 수밖에 없는 현실
연구실을 이끄는 교수들은 “연구비 공동관리가 답답한 건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토로한다. 연구실 관리를 위해서는 적정 규모의 비용을 시점에 관계없이 운영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의 구조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풀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비현실적인 연구실 살림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불법적인 풀링을 받아들이는 교수들. 이래저래 연구에 집중할 수 없는 환경이 즐비하다.
국내 대학을 졸업하고 연구실 생활을 한 이규현(가명)씨는 “국내 대학 교수 연구실의 연구비 운영 문제가 좋지 않은 관행이며 불법적이고, 개선돼야 한다는 점에 100% 동의한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년간 관행으로 존재한 이유는 단순히 국내 대학 교수들이 ‘도둑놈’이라서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유럽지역 연구소에서 일하며 국내 연구소의 사정을 떠올리게 됐다.
오랜 기간에 걸쳐 꾸준히 진행되는 연구와 달리 연구비 조달 과정은 매우 불안정하고 무작위로 채택돼 기복이 심하다. “교수들은 정부기관이 발주하는 과제에 지원해 심사에 통과하면 연구비를 받고 착수합니다. 과제마다 시작 및 종료일이 다를 수밖에 없죠. 각 프로젝트에 지원된 연구비는 연구기간 동안 지출하지 못하면 반납해야 합니다. 프로젝트 진행 도중 대학원에 입학한 학생연구자는 이미 제출된 인건비 사용계획에 누락돼있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없고 인건비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 대비해 학생들의 인건비를 안정적으로 제공하려 조성한 것이 바로 공동관리하는 ‘랩(labㆍ실험실을 뜻하는 laboratory의 준말)비’입니다.”
교수들은 연구비 운영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서울의 한 사립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는 “인건비 공동관리를 실시하고 있는데 이는 학교 전체 연구비의 20%로 제한되어 있어 연구비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이 제한을 풀면 연구비 운영의 어려움이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내와 해외에서 수학한 경험이 있는 다른 연구원 송민식(가명)씨도 “인건비를 공동관리하지만 자신을 위해 한 푼도 쓰지 않고, 전액을 학생들의 등록금과 랩 수리를 위해 사용하는 양심적인 교수들도 많다”며 “풀링이 연구실 운영에 주는 순기능도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송씨는 풀링으로 해결된 여러 문제를 예로 들었다.
“서로 다른 과제를 맡은 학생연구자 A, B가 각 150만원, 50만원의 인건비를 받습니다. 연구실 기여도는 같은데 같은 연구실 내에서 인건비는 다른 것이죠. 이 때 월급을 모아 차별 없이 100만원씩 나눠줄 수 있습니다.”
송씨는 “연구비 조달시기와 규모가 안정되면 인건비 공동관리나 횡령 등의 문제가 줄어들 것”이라고 봤다. 그는 연구비 운영의 자율성은 제한하되 유연성은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구비를 반납하지 않아도 된다면 쓰고 남은 비용은 반드시 필요한 연구에 투입돼 지식의 발전에도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또 정부기관이 각 대학교 산학협력단을 거쳐 교수에게 지급하는 연구과제 비용을 학생들이 직접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제시됐다. 현행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연구재단, 각 대학 산학협력단을 거쳐 연구실로 들어오는 복잡한 행정구조 탓에 공동관리가 필요악처럼 불가피하게 행해진다는 주장이다.
◇연구비는 복지비 아니다…교수 운영의 문제 지적도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학자들이 학문이 아닌 돈을 따르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이다. 연구비 문제에 대해 오랜 기간 고민했다는 홍성출 전북대 의대 교수는 “대학이 도덕성을 잃으면 사회가 무너진다”며 “교수들이 돈을 추구하니 여러 문제가 불거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내 교수 연봉은 일본보다 높고 국가가 지원하는 연구비는 독일과 비슷한 수준이어서 현행 연구비 지원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연구실 학생들과 회식하는 비용은 연구비가 아니라 교수 개인 돈을 쓰면 됩니다. 저는 국내에서 출장 갈 때 출장비를 신청한 적이 없습니다. 대신 몇 년에 한 번 꼴로 해외 학회에 갈 때는 재단에서 비즈니스 클래스 항공권을 지원 받습니다.” 그는 “종종 연구비 유용 혐의로 재판받는 교수들이 국립대 교수 월급이 터무니없이 적은 것처럼 허위 사실을 말하는 모습을 목격했다”라며 “2002년 일본 도쿄(東京)대 의대를 방문했을 때 보니 연차가 5년 높은 임상교수의 월급은 국내 의대보다 적었다”고 말했다. “연구비는 연구하는 데 써야 하는데 일부 교수들은 먹고 마시는 일에도 국민의 세금을 지원받기 원합니다. 돈을 추구하면 대학에 있으면 안 됩니다. 대학은 학문을 사랑하고 학문에 목숨 거는 사람들이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연구비 운영을 온전히 대학교수에게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은 더 있다. 지방의 국립대 인문계열에 재직 중인 문효인(가명) 교수는 국가연구사업을 수행하다 연구비가 남으면 연구재단에 돌려준다고 말했다. 당장 얼마 뒤 연구실 살림살이가 힘들어질 게 뻔하지만 다른 명목으로 지출했다가 적발되면 ‘연구참여 제한조치’를 당해 연구비 수입이 끊기면 교수 자신에게나 학생들에게나 손해가 크다는 판단이다.
이처럼 연구목적으로만 인건비를 지출하고 남은 비용은 반납까지 하는 ‘양심 교수’들은 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연구비가 엉뚱한 대상에게 부당하게 지출될 때 가장 억울하다고 말했다. 이들은 “한국 국가연구비 규모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부끄럽게도 연구비 횡령 규모와 빈도 역시 세계에서 그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 1위를 기록하고 있다”라며 탄식했다.
과학계를 둘러싼 엘리트주의 탓에 이대로 두면 더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어 도덕성과 윤리에 맡길 수 없다는 자성도 나온다. 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한 연구원은 “대학교수들은 윤리 교육을 받거나 도덕적으로 훈련된 사람들이 아니다”며 “오히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스스로의 성장을 위해 자기중심적인 선택을 한 경우가 많다”고 말문을 열었다. “풀링한 랩비로 실험실을 편리하게 운영하다 보니 간혹 일부 교수들이 자제심을 잃고 ‘횡령’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연구비 집행 문제는 정책이나 규정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당사자인 과학계의 교수와 연구자들이 편의주의에서 벗어나 연구윤리를 체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한국연구재단 관계자도 “연구비 규정을 보면 인건비뿐 아니라 연구장비 및 재료비 등을 충분히 지원하고 있다”며 “연구비는 교수와 학생연구자들의 복지비가 아니다”고 역설했다. “종종 연구실의 회식 술값이나 커피비용은 지원이 안되냐고 묻는 분이 계십니다. 이는 연구비의 성격을 혼동한 것입니다. 또 남은 인건비는 경우에 따라 이월시켜 주기도 합니다. 충분히 쓰고도 남을 정도로 연구비를 신청했다면 과다 신청한 것이므로 그 자체로 문제입니다. 연구계획은 6개월~1년 전에 이미 나오기 때문에 계획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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