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마이너리티] <16> 조손가족
“제 이름이에요. 잘 썼죠?”
여섯 살 은석(가명)이가 스케치북에 이름 석자를 또박또박 적어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그런 손자를 할머니 조모(63)씨는 잠시 흐뭇하게 바라볼 뿐, 얼굴에 이내 그늘이 드리워졌다. 비좁고 허름하기는 해도 두 식구의 버팀목이 돼 준 보금자리를 떠나야 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요즘 들어 떠나질 않아서다. 할머니는 은석이 엄마가 100일도 안된 갓난쟁이를 버리고 가출했을 때부터 손자를 떠맡아 키웠다. 세살 무렵 아빠도 사고로 숨지면서 가세는 갈수록 기울었다. 한달 벌이라곤 은석이 앞으로 나오는 기초생활수급비 40만원과 조씨의 장애수당(신장장애 2급) 30만원, 정부 양육보조금 15만원 등 채 100만원이 안된다. 3년여 전 은행 대출 2,000만원을 끼고 서울 동작구의 다세대주택에 전세(보증금 5,500만원)로 들어왔지만 집주인이 바뀌면 언제 쫓겨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는 “손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이라도 살아 있는 게 유일한 바람”이라고 했다.
은석이네는 ‘조손(祖孫)가족’이다. 조부모와 손자녀로 이뤄진 가구 형태를 말한다. 20년 전만해도 생소했던 이 용어는 외환위기를 지나면서 우리 사회 전면에 등장했다. 계속된 경기침체는 가족해체를 심화시켰고 부모와 성인 자녀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던 ‘완충 세대’는 점점 사라져 갔다. 그렇게 주요 사회문제가 됐다.
증가세도 가팔라 2005년 5만8,058가구였던 조손가족 수(통계청 장래가구 추계)는 10년 만에 15만3,000가구(2015년)로 3배 가까이 급증했다. 20년 뒤인 2035년이면 다시 두 배(32만1,000가구) 껑충 뛸 것으로 정부는 추산하고 있다. 당연히 이런저런 지원 정책도 꽤 생겼다. 하지만 조손가족은 여전히 힘들다. 가난해서 힘들고, 아파서 괴롭고, 또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을 몰라 절망한다. 사회적 약자들의 결합인 탓에 노인빈곤과 아동빈곤, 세대갈등 등 다양한 요인이 중첩돼 복지정책의 사각 아닌 사각지대로 남아 있다. “복합위험 상황에 놓여 있는 조손가족 문제를 방치하면 미래의 복지위기를 불러올 것”(최영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이라는 경고를 외면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빈곤의 그늘 언제까지
조손가족에 대한 정부 차원의 실태 조사는 2010년 여성가족부 주도로 딱 한 차례 있었다. 당시 조사에서 조부모들은 △부모의 이혼ㆍ재혼(53.2%) △부모의 가출이나 실종(14.7%) △부모의 질병ㆍ사망(11.4%) △부모의 실직ㆍ파산(7.6%) 등을 손자녀를 직접 양육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꼽았다. 며느리의 가출과 아들의 죽음, 사망 전 아들이 남긴 수천만원의 부채 등 조씨가 손자를 맡아 고난을 겪게 된 과정과 유사하다.
조손가족이 맞닥뜨린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빈곤이다. 부산에 거주하는 김모(77)씨는 현재 거동이 불편한 남편(78)과 11세, 8세 두 손자를 홀로 부양하고 있다. 이 가족의 월수입은 김씨가 일주일에 다섯 번 빌딩 청소를 하고 받는 70만원과 부부의 기초노령연금 40만원(각 20만원)이 전부다. 각종 공과금과 전세대출 원리금(30만원)을 내고 나면 생활비를 충당하기도 벅차다. 4인가족 최저생계비(271만원)에 턱없이 못미쳐 누가 봐도 국민기초생활보장법상 수급 요건에 해당하지만 김씨는 아직 자격을 얻지 못했다. 김씨는 “오래 전 아이들 부모가 헤어지고 아들은 연락조차 두절됐으나 부양의무자로 등록돼 수급 신청을 번번이 거부당했다”며 “손자들 이가 다 썩었는데도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하는 형편”이라고 토로했다. 기초생활수급은 정부가 빈곤 가정에 부여하는 기본적 혜택이지만 자격 규정에 가로 막혀 생계비 및 의료서비스 지원에서 배제된 조손가족이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경제적 지원 정책이 버젓이 있어도 이를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도 많다. 아동복지법에 근거해 조손가족을 지원하는 ‘대리양육가정위탁’이란 제도가 있다. 사망과 가출, 수감 등 특정 사유로 부모의 양육이 불가하다는 점을 입증하면 조부모를 상대로 일정 교육을 거쳐 월 15만~20만원의 보조금을 준다. 그러나 해당 지방자치단체에 직접 신청해야 하는데다 조부모들은 정보접근 능력도 크게 떨어져 제도에서 소외되곤 한다. 조씨 역시 대리양육위탁 자체를 전혀 몰랐다가 친지의 권유를 받고 나서야 뒤늦게 지원금을 신청할 수 있었다. 실제 2016년 대리양육위탁 아동 수는 전체 조손가족 규모에 견줘 미미한 수준인 8,594명에 그쳤다. 노지영 서울가정위탁지원센터 대리는 “조손가족은 지자체 사회복지 업무에서도 비중이 작아 담당 직원이 얼마나 의지를 갖고 홍보하느냐에 따라 수혜 편차가 크다”고 설명했다.
제약은 까다롭고 지원제도는 여기저기 분산돼 있다 보니 조손가족의 연간 평균소득(2016년 기준)은 2,175만원으로 전체가구(4,883만원)의 45%에 불과하다. 다문화가족(4,328만원)이나 장애인가구(3,513만원)보다도 현격히 낮은 수준이다.
◇자립 의지 꺾는 질병의 고통
다른 세대유형과 비교해 조손가족은 고령이 대부분인 조부모의 특성상 질병으로 신음하는 비율도 높다. 신체ㆍ정신적 결함은 근로능력 저하로 이어져 빈곤을 더욱 부추긴다. 외손녀(13)를 혼자 키우는 이모(62)씨는 십수년째 정신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전 남편의 지속적인 폭력으로 생긴 우울증(정신장애 3급)은 지금도 그를 괴롭힌다. 수면제 없이는 잠을 청하기도 어려워 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기초생활수급비와 장애수당만으로 생활해야 하는 터라 빚은 쌓여 갔고 아파트 관리비 15만원도 4개월째 밀려 있다. 이씨는 “의료비 지원을 받아도 병원 치료와 약값으로 다달이 10만원이 별도로 든다”며 “경제적 탈출구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도 이씨는 장애아동을 기르는 이모(72)씨에 비하면 사정이 나을지 모른다. 필리핀인 며느리는 손자 재형(6ㆍ가명)이를 출산한 후 몇 차례 가출을 반복하다 집을 나가버렸다. 아들마저 재작년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양육은 오로지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이씨 자신도 허리디스크 수술로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고통은 끝이 아니었다. 또래보다 말을 못해 그저 느리다고만 생각했던 재형이가 병원에서 언어발달장애 판정을 받은 것. 당장 한 달에 32만원하는 재활비용도 부담이거니와 치료 시기를 놓친 바람에 내년에 손자의 초등학교 진학을 미뤄야 할지 말지, 이씨는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다. 장애조손가족 활동보조인으로 일하는 박철수(57)씨는 “장애인 돌봄은 전문교육을 이수해야 서비스 제공이 가능한 영역”이라며 “기초지식이 없고 힘도 약한 조부모가 몸이 불편한 손자녀를 온전히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고 전했다.
◇정서적 괴리와 세대 갈등
충남의 한 소도시에서 손자 3명을 키우는 김모(72)씨는 올 들어 중학교 2학년 큰 손자 용태(15ㆍ가명)에게 소리치는 날이 많다. 사춘기가 왔는지 이것저것 사달라 부쩍 떼를 쓰고 그 때마다 혼을 내면 아이는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어 몸무게가 벌써 80㎏을 훌쩍 넘겼다. 걱정은 또 있다. 내성적인 성격에도 용태는 공부를 잘해 반에서 늘 1, 2등을 다툰다. 손자는 내심 학원에 다니고 싶은 눈치지만 기초생활수급비 130만원으로 사는 빠듯한 형편에 사교육은 언감생심이다. 김씨는 “부모 없이 자랐다는 말을 듣기 싫어 항상 엄하게 대했는데 아이들이 커갈수록 대화하기가 힘들다”면서 “영어ㆍ수학 학원비를 보조해 주는 방안이 나와 공부라도 제대로 시켰으면 원이 없겠다”고 답답해 했다.
지금까지 정부의 조손가족 관련 정책은 주로 저소득층을 겨냥한 경제적 지원에 초점이 맞춰져 왔다. 그러나 이들을 현장에서 돕고 있는 복지단체 관계자들은 양육방식 부재에서 비롯된 정서적 괴리와 세대갈등에 보다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씨 가족 사례처럼 혈연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조부모가 손자녀 돌봄에 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다. 양육 대리자로서 의지는 분명하나 부모와의 갑작스런 이별에서 오는 아이의 정서적 혼란을 적절히 다루지 못하면서 소통 단절과 갈등이 싹트는 식이다. 조부모의 미숙한 학업지원으로 인한 손자녀의 학습부진 현상 역시 조손가족의 숙제로 남아 있다. 조손 세대는 특히 손자녀가 성장할 때까지 가족 형태가 장기간 지속된다는 점에서 정서발달 지체나 학업능력 저하 문제는 쉽게 회복하기 힘들고 자칫 대물림 될 가능성도 있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아동복지연구소 김은정 소장은 “부모와의 생활을 기억하고 있는 아이에게 권위적인 양육 태도를 강요하다 보면 다툼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다만 조부모가 방임을 경험한 손자녀의 사회 적응에 긍정적 영향을 주기도 하는 만큼 ‘조용한 안전망’이 되어 안정적인 가족체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이삭 기자 hiro@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