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국가연합(ASEANㆍ아세안)이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으로 세계 경제에 드리워지고 있는 암운에 제동을 걸 큰일을 시도 중이다. 유럽연합(EU)과 같은 단일 경제권을 목표로 지난 2015년 아세안경제공동체(AEC)를 출범시킨 뒤 인구 6억5,000만의 시장 통합에 잰걸음을 하고 있는 이들 국가들이 AEC보다 5배 이상 큰, 한중일과 호주, 뉴질랜드, 인도가 더해진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협상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며 타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타결될 경우 다자주의 무대에서 발을 뺀 뒤 양자관계 우선 정책으로 세계 경제에 먹구름을 뿌리고 있는 미국에 대해 작지만 의미 있는 압박이 될 것으로 보인다. 참가국 수는 16개에 불과하지만 RECP이 출범하면 세계 인구 절반인 36억을 묶는 세계 최대의 자유무역협정(FTA)이 된다. 경제규모는 세계 전체의 3분의 1이다.
◇‘브레인’ 싱가포르, 외교력 집중
17일 아세안 외교가에 따르면 올해 아세안 의장국을 맡고 있는 싱가포르가 RCEP 최종 타결에 외교력을 집중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관계자는 “아세안의 ‘브레인’인 싱가포르가 임기 중 성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데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며 “내달 중순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동아시아정상회의(EAS) 기간 의미 있는 이벤트가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역내 통상 장관들이 지난 7월 일본에서 가진 RCEP 회의에서 선언한 ‘연내 출범’ 일정을 한달 가량 앞당기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EAS에는 RCEP 협상 16개국이 모두 포함돼 있다.
빌라하리 카우시칸 싱가포르국립대 중동연구소장은 이달 초 동아시아ㆍ아세안경제연구소(ERIA) 행사에서 “미중 무역전쟁으로 인한 장기적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동남아 공동시장과 공동 생산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며 “여기서 아세안이 과감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특히 그는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아세안이 미국이나 중국의 손 안에 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며 AEC의 외연 확장 필요성을 강조했다. 아세안이 RCEP에 나서는 이유와 일치한다.
사실 RCEP 타결에 따른 경제적 효과에 대한 기대는 크지 않았다. 아세안을 중심으로 RCEP에 참여하는 6개국 모두 FTA 또는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이 체결돼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조업 기반을 이제 닦아가고 있는 인도가 중국 상품의 유입을 반대하는 바람에 관련 논의가 제대로 진전되지 않았다.
◇미국 독주에 뭉치는 아시아
하지만 지난 6월 초 모디 총리가 싱가포르를 방문한 뒤 상황이 바뀌었다. 당시 열리고 있던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에서 “아시아의 미래가 인도와 중국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고 역설, RCEP 타결 가능성을 내비쳤다. 싱가포르와 한국 등 교섭국들의 인도에 대한 끈질긴 설득 작전이 주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인도 매체 커넥티드 투 인디아는 ‘싱가포르 이스와란 통상장관이 인도를 방문해 모디 총리에게 RCEP 조기 타결에 대한 협조를 촉구했다’고 전했다.
이 과정에서 인도는 참가국 개발 단계를 고려한 특별한 대우(differential Treatment)와 개발도상국에 대한 유연한 대응을 요구했다. 곽성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신남방경제실장은 “서비스와 투자부문에서 먼저 문을 열고 상품에 대한 협정은 시간을 두고 개방하는 방안이 유력해 보인다”고 말했다.
모디 총리가 추진하고 있는 ‘액트 이스트(Act East)’ 정책 동력 확보 차원에서도 인도는 RCEP에 나설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액트 이스트 정책은 모디 총리가 중국을 견제하고 동남아시아와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일종의 동진 전략이다.
외교장관을 지낸 인도 정책연구소의 시암 사란 선임연구원은 최근 낸 보고서에서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인도의 경제활동이 축소되면 이 지역에서 안보ㆍ정치적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며 “액트 이스트 정책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지역 경제 통합에 참가하는 것은 필수적이다”고 말했다. 인도는 RCEP 참가 16개국 대부분이 가입하고 있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21개국 모임에 포함돼 있지 않다.
◇’메시지’ 중심의 낮은 FTA 가능성
인도의 이 같은 위기의식과 함께 RCEP 조기 타결 가능성을 높이는 또 다른 요인은 미중 무역전쟁이 본격화 하면서 형성된 중국과 일본이 급속한 관계 개선이다. 무역 전쟁으로 미국 수출이 어려워진 중국은 신규ㆍ대체시장 필요에 따라 인도와 아세안으로 시장을 넓혀야 하고, 일본은 지난 3월 체결한 포괄적ㆍ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서 미국이 갑자기 빠지면서 생긴 공백을 다른 시장에서 찾아 메워야 하는 처지다.
실제 아세안에서 중국을 견제하던 일본은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에 동참하기로 했다. 최근 양국은 통화 스와프 재개에도 합의했다. 이달 말 베이징서 열릴 정상회담에서 양국 관계는 최고조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박번순 고려대 경제통제학부 교수는 “인도가 중국의 공산품 관세 장벽을 허물기는 힘들 것인 만큼 RCEP이 타결 되더라도 낮은 수준의 FTA가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며 ”대신 아세안 중심의 자유 무역 의지를 대외에, 특히 미국에 알리는 정치적 효과는 상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시아 중심의 초대형 FTA 출현이 통상협상에서도 일방주의적 행보를 보이는 미국을 다자무대에 끌어들이고, 미중 무역전쟁 종식을 조기에 앞당기는 데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싱가포르ㆍ호찌민=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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