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멀다 하고 동네 풍경이 바뀌는 한국에서 수십 년간 묵묵히 버텨낸 가게들이 있다. 사람이 오가고 물건이 드나드는 가게에는 세월만큼의 이야기가 쌓여 ‘기억의 지층’을 이룬다. 한 입 물면 입안에 한 시대가 들어오는 음식점, 시대 변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옷 가게, 시간의 무게를 담은 이발소와 목욕탕…전국 방방곡곡의 오래된 가게를 통해 한국의 변화상을 격주로 연재한다. 수십년간 장사를 이어간 비법도 들어본다.
서울 종로3가와 퇴계로3가를 잇는 세운상가는 1968년 ‘국내 최초 주상복합건물’로 세워졌다. 호황이던 시절 미사일, 탱크, 인공위성 빼고 쇠로 만든 제품은 전부 구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던 그곳은 1987년 용산전자상가가 문을 열면서 서울 도심 슬럼화의 상징이 됐다. ‘세상의 기운이 다 모인다(世運)’는 이름이 제 역할을 하는 걸까. 흉물로 방치됐던 세운상가는 최근 카페ㆍ갤러리ㆍ공방이 생겨나며 20대들의 ‘힙한 장소’로 주목받고 있다.
세운상가 564호 ‘진테크’ 사장 황종진(72)씨는 딱 50년 전 이곳에 가게를 열었다. 주 종목은 빈티지 오디오 수리. 고장 난 기기를 귀신같이 잘 고쳐, 국내 오디오 좀 모은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황도사’ ‘황박사’로 불린다. 웬만한 전문점에서 수리를 포기한 오디오가 전국 팔도에서 이곳으로 온다. 세운상가가 슬럼가인 시절에도 이곳만은 문전성시를 이뤄 수리 한번 맡기면 기본 몇 달은 각오하고 기다려야 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올 여름에는 고관절 수술로 6~8월 영업을 쉬었다. 최근 이곳에서 만난 황종진 사장은 “고칠 물건 받아놓고 몇 달씩 쉬면, 상식적으로 욕먹을 줄 알았는데 한결같이 내 건강을 걱정해 주니까 고맙더라”고 말했다. 수리는 보통 일주일 안에 끝나지만 길게는 일 년도 간다. “다른 업자가 잘못 고친 부분을 원상태로 돌려놓고 원래 문제를 고치니까 품도 시간도 서너 배씩 더 걸려요. 수리비는 좀 더 받을지 모르지만 ‘업자의 업자’가 돼야 하니까 저는 너무 힘들죠. 그래도 못 고쳐본 기억은 없습니다.”
◇맏딸 소설가 황정은 한때 접수 일 도와
오후 3,4시 쯤 가게에 나와 밤새 일하고 첫 차를 타고 목동 집으로 간다. 그래서 붙은 또 다른 별명이 ‘황올빼미’. 저녁 7시부터 한가해지면 마음잡고 일을 시작한다. “좋은 말로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는 거죠. 그때는 전화와도 성질이 나요. 기계하고 대화를 해야 되는데, 전화 받고 한눈 팔다 보면 일의 실마리를 놓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거든. 근데 또 단골들이 제가 밤늦게까지 있다는 걸 눈치 채버렸네. 느닷없이 올 때가 있어요.” 맡겨진 오디오 대부분이 족히 수십 년을 넘긴 제품이다. 진공관부터 트랜지스터, 요즘의 디지털 소자까지 작동원리ㆍ생김새ㆍ부품까지 같은 게 하나도 없지만 황 사장은 대충 보면 어디에 이상이 있는지를 안다. 황 사장은 “잘 안 보일 때는 하던 일을 멈추고, 다음 날 기계와 찬찬히 대화를 다시 나눈다. 한 번 고칠 때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하루 2~3개를 고치면 밤이 다 지나간다”고 했다.
몇 년 전까지 낮 동안 맏딸이 나와 사무를 보며 수리를 접수했다. 지금은 유명 소설가가 된 황정은씨로 이때 경험을 빌려, 세운상가 오디오 수리점을 배경으로 종종 작품을 쓴다. 40년 된 전자상가 수리실에서 접수를 맡는 은교가 주인공인 ‘백의 그림자’는 2010년 한국일보 문학상을, 세운상가 564호에서 음향기기 수리 일을 하는 60대 남자 여소녀가 주인공인 ‘웃는 남자’는 2017년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했다. 인터뷰를 하던 중 이런 사실을 알게 됐다는 황 사장은 “등단작이 ‘마더’인데 그것도 못 봤다. 정신의 내면을 훔쳐보는 것 같아 딸이 쓴 작품을 못 읽겠더라”고 말했다.
◇1970년대 전성기 지나며 세운상가 쇠락
이곳에 문을 열기 전 황 사장은 청계천 뒷골목에 ‘IC전자’라는 ‘래디오방’을 먼저 열었다. 라디오(“그 시절에 오디오가 어디 있어 다들 ‘래디오’라 그랬지”), 텔레비전 같은 각종 전자 기기를 고치는 전파사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한 전파사에 기사로 취직했고, 우여곡절 끝에 군대 통신학교 교재를 구해 독학으로 전자제품 회로를 공부했다. “당시만 해도 겁이 없던 시절”이었고, 고치다가 기계를 망가뜨려도 손님이나 가게 주인이 지금처럼 살벌하게 말단 직원을 몰아치지 않았다. 신명 내며 기계를 열었고, 책을 파며 공부했다. 한번 기계의 이치와 원리를 터득하자 부품 사이를 잇는 길이 보였다. 수리에 자신이 붙자 당시 획기적이었던 ‘IC회로’에서 글자를 따와 전파사 이름으로 썼다. 황 사장은 “많이 연구해야 한다. 배우지 않고 경험만 고집하면 길을 놓친다. 배움만을 앞세우고 경험이 없으면 실수를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전자 회로라는 게 ‘이렇게 법을 공부했으면 판검사 했겠다’ 할 정도로 배우기 힘들거든요. 근데 우리 같은 사람은 한번 잡으면 결말을 봐야 하는 끈기가 있으니까, 계속 공부했죠. 그러고 살았어요 여태.”
1970년대 청계천 전성시대를 겪으면서 황 사장의 기술도 명성도 늘었다. 베트남전과 중동건설 현장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외제 오디오를 사오는 게 관례였고 그런 물건이 세운상가로 몰려들었다. 외국 제품이 정식 수입되지 않던 때 세운상가 수리점에 일감이 몰리는 건 당연했다. 황 사장은 그 시절을 “상가를 둘러싸고 길게 줄이 늘어섰던 시절”로 기억했다. 용산전자상가가 문을 열고 무료로 가게를 내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했다. 황 사장은 “아래층 중고 오디오 파는 가게들이 난리가 나서 (가게 이전을) 막았다. 나는 그것보다 여기 정이 많이 가서 안 옮겼다. 그래도 먹고살만 했다”고 말했다.
그랬던 그도 딱 한 번 실수했던 적이 있다. 그는 “잠깐 한 눈팔았다가 호된 대가를 치렀다”고 말했다. 1990년대 초반 전자제품 대리점을 열었지만 사람을 잃고 빚을 얻었다. 딱 6개월간 일을 쉬고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다른 전자제품 수리를 접고 빈티지 오디오에만 집중했다. 텔레비전, 컴퓨터처럼 “친해질만 하면 단종되는” 일도 없었고 “왜 또 고장 나냐고 타박하는 손님”은 더더구나 없었다.
◇오디오 수리만 할 뿐 거래는 일절 안 해
늦은 오후 인터뷰 중에 계속 전화벨이 울렸다. 대부분 맡긴 물건이 수리됐는지를 확인하는 전화였다. “아 그거 다 됐어요. 내가 엄청 고생했네. 힘들었어요. 다섯 번을 열었다 닫았다 했어요.” 비용을 꽤 내야 한다는 소리다. 황 사장의 수리비는 ‘노동의 양’과 비례한다. 들인 품과 시간이 많을수록, 구하기 힘든 부품이 고장 날수록 수리비가 비싸진다. 황 사장은 “예전에는 순진하게 살았는데, 내가 일한 것만큼은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언젠가부터 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비싼 오디오는 ‘위험수당’을 붙인다. “나도 꽤 ‘커리어’가 있는 사람인데, 비싼 오디오 고칠 때 아직 떨려요. 보상은 받아야겠더라고요.”
물론 장사에 원칙이 있다. 도사라 불리지만 황종진씨는 수리가 완벽하다고 단언하지 않는다. 수십 년 묵은 오디오가 다시 고장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라는 게 지론이다. 하지만 자기가 고쳐준 오디오가 또 고장 나면 다시 고쳐 주겠다고 약속하고 반드시 지킨다.
수리만할 뿐 중고 오디오를 거래하지도 않는다. 황 사장은 “거래하면 잔머리를 굴리게 된다. 중고 오디오 살 때랑 팔 때 제 말이 달라지고, 손님들에게 제가 싸게 사서 비싸게 팔 거란 선입견이 생긴다. 그래서 일절 매매는 안 한다”고 말했다. “이 일에 자부심이 있어요. 기술이 있으니 이 나이까지 일할 수 있어 행복하죠. 내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고 고쳐야 할 기계들이 있으니까. 그래서 더할 나위가 없죠.”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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