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전 세종대에 확인된 양국 격차의 생성ㆍ확대 배경의 하나로 상공인 박대를 살펴본다. 조선에선 이들의 신분상 지위가 농민보다 낮고 상공업은 본업인 농업과 대비되어 말업으로 불리웠다. 왕조실록에 수록된 상공업 발전 제안에는 1882년 조문의 짤막한 소 정도가 있다. 양민인 상공인조차 일의 특성상 백성의 눈높이에선 천역인 ‘신양역천’으로 비춰진다. 공식적인 신양역천은 하급 관원인 조례ㆍ나장ㆍ일수ㆍ조군ㆍ수군ㆍ봉군ㆍ역졸과 염간ㆍ진척ㆍ화척ㆍ양수척 등이다.
일본의 상공인은 신분이 농민과 대등하고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도시 조닌의 주류인 이들은 경제적으로 여유로워 무사 대상의 대금업에 나서 힘까지 지닌다. 또 근대화의 주역으로 전통문화의 보존과 발전 등 일본 역사의 품격 제고에도 기여한다.
어찌된 일인지 유학에 밝은 조선 선비들이 중용 20장에 수록된 구경(九經)의 하나인 ‘여러 공인들을 불러… 재화와 서비스를 풍족히 한다(來百工...財用足)’를 애써 외면한다. 중종대인 1523년 윤 4월 대우가 나쁘고 일이 가혹하여 도망가는 공인이 늘자 같은 달 18일 홍문관이 소를 올려 “공인은 자기의 몸을 수고롭게 하여 천하가 편리하도록 만들어 주는 자로 그 공이 크니 대우를 알맞게 하고 노고를 보상하여 사기를 진작시켜야”라고 제안하지만 이때는 물론 이후에도 수용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기억에 남아 있는 공인이 몇 없는데 대동여지도의 김정호가 공인일지 모른다. 대우받지 못한 판각의 명 각수인 그에 관한 기록이 양반 외 인물을 다룬 유재건의 이향견문록(1862년)에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유전쟁때 남원에서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잡혀 포로가 된 도공(陶工) 심당길과 ‘심수관’으로 공방을 이어오는 그 후손들이 있다.
역사서에 나오는 상인은 제법 되지만 말업 종사자라는 인식때문인지 잘 알려진 인물은 적다. 18세기 후반 활약해 채제공의 번암집 55권 만덕전에 소개된 제주 여성 거상 김만덕이 알려진 편이다. 조선 말기에는 상인에서 관료, 정치가로 변신한 이용익과 이하영이 있다. 보부상이었던 이용익은 금광으로 큰 돈을 번 후 민영익과 가까워져 발탁된 후 탁지부장 등을 역임하며 고종의 측근 친러파로 활동한다. 이하영은 몰락 양반가 태생으로 일인 가게에서 일하며 일어를 익히고 의료 선교사 알렌을 만나 미 공사관에 근무하며 영어를 배운다. 어학 능력으로 발탁된 후 고종 측근으로 활동하다 망국이라는 실격의 역사에 책임이 큰 친일파로 각인된다.
일본에는 알려진 명장들이 꽤 있다. 포로 경험이 있는 강항은 간양록의 예승정원계사에서 이 사회의 명인에 대한 예우를 소개한다. “왜의 풍속은 백공의 모든 일에 한 사람을 내세워 천하일을 삼고, 한 번 이 사람의 손을 거치면... 금은의 중가로 보상하며... 대명이자 다인인 후루타 오리베는 매사에 천하일의 칭호를 얻는데... 그가 좋다고 말하면 값을 따지지 않는다... 그의 재산은 이에야스와 견줄 만하며... 그 외 천하일도 이런 부류다.” 일본도를 만든 도공(刀工) 마사무네와 무라마사도 유명하다. 전자는 14세기 초반, 후자는 16세기 초중반 활약하는데 국보로 지정된 작품이 많다. 무라마사는 가부키나 우키요에 등 창작물의 소재로도 활용된다.
상인 중에는 사료에 기록을 남기는 수준을 넘어 오늘날까지 가업을 이어온 곳도 많다. 17세기 중후반 포목점과 금융업을 일으킨 미쓰이 다카토시, 18세기 전반 귤과 간연어 등에 특화한 기노쿠니야 분자에몬, 18세기 후반 출판업을 일군 쓰타야 주자부로 등이 유명하다. 상인 출신 인물에선 임진전쟁의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20대 전반까지 조선 인삼 등을 취급하였고, 히데요시 측근으로 다인 겸 정치가인 센노리큐는 50대까지 사카이에서 창고업을 운영하였으며, 일본 전도를 작성한 측량가 이노 다다타카는 40대 후반까지 양조업 등에 종사하였다.
에도시대의 상공인은 대부분이 조닌층이었지만 근대에 들어서면 구 무사 출신들까지 무역상과 실업가로 변신한다. 도사 태생의 하급무사 사카모토 료마가 세운 가메야마사추는 일본 최초의 상사이고, 그의 고향 친구 이와사키 야타로는 관원에서 정상(政商)으로 변신해 재벌계 기업 미쓰비시를 일군다. 사쓰마번 상급무사 고다이 도모아쓰는 고위 관료를 물러나 광산업, 제염업에 진출했다가 오사카 상공회의소와 증권거래소를 창립한다. 구 막부 관료인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도쿄권과 한반도에서 고다이 이상의 활약을 보인다.
정리하면 상공업과 그 종사자에 대한 인식과 대응의 차이가 개화기 이후 산업화에 영향을 미쳐 양국을 열강의 일원과 식민지로 갈랐다. 그 결과 우리는 1960년대에야 일본 추격에 나서게 되는데 상공인들이 그간의 굴레와 멍에가 벗겨지고 유무형의 당근이 주어지자 놀라운 잠재력을 발휘한다. 추격 후 추월을 넘보려면 ‘현대판 상공인 박대’인 공무원과 전문직 선호, 약한 기업가정신과 창업 경계 분위기의 벽부터 허물어야 할 것이다.
배준호 한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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