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나라여도 지방마다 음식의 맛과 특징이 다르다. 서울에 전국 맛집이 다 모였다 하더라도 고향에서 즐기는 맛은 다르다. 맛있는 제주 흑돼지 음식점이 서울에 있어도 제주에서 ‘원조 흑돼지 전문점’을 기를 쓰고 찾는다. 이왕이면 원조에서, 아님 그 지역 출신이 요리한 음식을 선호하게 된다. 프랑스 음식도 마찬가지다. 서쪽의 노르망디 지역과 동쪽의 알자스 지역의 음식은 매우 다르다. 마치 전라도와 강원도의 김치 맛이 다르듯 같은 이름의 음식일지라도 지역마다 식재료에 대한 이해와 만드는 방법, 심지어 그 안에 담긴 정신마저 다른 특색을 갖고 있다.
미로 같은 이태원 뒷골목의 숨어 있는 보석, 라플랑끄
서울 용산구 이태원 뒷골목은 마치 미로같이 오르락 내리락 꼬불꼬불하다. 자칫 잘못 들어갔다가는 막다른 골목이나 심한 경사를 마주하게 된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모여있는 이곳은 골목 하나마저도 개성이 넘친다. 맛있는 곳을 찾으면 혼자 알기 아까워 많이 알리고 싶지만, 가끔은 나만 알고 싶은 곳도 있다. 너무 좋아서 혹시라도 알려져 유명해지면 오히려 다시 먹으러 오지 못할까, 나만의 보석으로 꼭꼭 숨기고 싶은 곳 말이다. 작은 골목일수록 신기한 일들이 가득한 이태원의 골목에 나만의 보석으로 간직하고 싶었던 프랑스 레스토랑이 있다. 라플랑끄(La Planque), 이곳은 도시로부터 벗어나 잠시라도 프랑스의 시골을 느낄 수 있는 은신처 같은 곳이다. 라플랑끄는 프랑스의 남동쪽 코르시카 섬에서 온 안톤 롬바드 오너 셰프가 운영하는 곳이다. 한국에 와서 처음 도전하는 곳이며, 조금은 다른 마음으로, 조금은 촌스럽게, 그러나 정 있는 곳을 만들어내고 싶어한다. 미식의 나라 프랑스의 품격과 격식 있는 요리들에 가려져 오히려 소박한 시골음식은 제대로 보여줄 기회가 오리려 더 적었던 게 사실이다.
프렌치 레스토랑이라고 하면 고가의 메뉴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기선 걱정 없다. 주머니가 가벼워도 프랑스 음식을 즐길 수 있다. 만원 이하 요리부터 있어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프랑스 음식 파티를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게다가 음식을 나눠먹기도 좋다. 각자 음식을 주문해 먹는 서양 음식 문화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여러 반찬을 가족과 함께 나눠 먹는 한국식 나눔의 밥상을 여기에서도 느낄 수 있다. 안톤 셰프는 말한다. "프랑스의 세련된 미식문화 뒤에는 소박한 나눔의 밥상도 있어요. 막상 집에서는 가족들이 푸짐하게 준비된 음식을 서로 나눠 먹습니다.” 그는 나눠먹는 한국의 음식 문화를 프랑스 집밥 풍경으로 이해한다.
리옹의 요리학교에서 요리를 배운 안톤 셰프는 막상 그의 요리에 대한 영감의 원천은 할머니라고 한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할머니 주방의 보조 셰프였다. 가족이 모이는 날이면 할머니의 옆에서 이것 저것 도우며 맛의 비법을 전수받았다. 시간이 나면 할머니와 함께 레스토랑을 다니며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그는 "레스토랑이 단순히 음식으로 누군가의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문화와 정성, 서비스가 결합된 곳이란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근대, 치즈, 돼지고기로 만든 소박한 시골 요리
안톤 셰프의 요리에는 코르시카에서 작은 숙박업을 하면서 음식을 제공하는 이모 할머니의 레시피도 빠질 수 없다. 섬에 오는 사람들에게 시골의 맛을 경험하게 해주는 이모 할머니의 손맛이 느껴지는 메뉴가 바로 ‘토마토 카넬로니(Cannelloni)’이다. 카넬로니는 파스타의 한 종류이다. 오븐에서 갓 나온 카넬로니는 누룽지처럼 노릇노릇 바삭하다. 그 사이사이 흘러내리는 에멘탈 치즈와 모짜렐라 치즈에 군침이 돈다. 테이블에 올라온 모습을 보면 언뜻 라자냐와 비슷하지만 안에는 푹 익은 푸르스름한 근대가 넓은 면의 카넬로니에 롤처럼 돌돌 말려 들어있다. 눈이 소복하게 내린 듯 리코타치즈가 부드럽게 익은 근대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진하고 고소한 맛을 낸다. 영양가가 풍부한 근대는 한국에서는 된장국과 나물 재료로 친숙하다.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근대는 빨간 무 모양인 비트의 잎이다. 예부터 지중해 인근에서 비트가 많이 생산되어 근대도 그들의 맛있는 식재료가 되었던 것이다.
코르시카섬 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역에서 돼지고기는 사랑 받는 식재료다. 돼지고기의 내장부터 지방까지 버리는 것 없이 다양한 샤퀴트리(프랑스식 가공육)로 변신하여 저장식품으로 즐겨 먹는다. 그 중 리예트는 돼지고기로 만든 스프레드다. 푹 익힌 돼지고기에 향신료를 넣고 함께 잘게 간다. 고운 살코기와 지방의 조화에 부드러움과 고소한 맛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라플랑끄에서는 돼지고기에 닭고기를 더해 고기 씹는 식감이 더 느껴지는 담백한 리예트를 즐길 수 있다. 리예트는 맛있는 바게트와 함께라면 식사 전에 에피타이저로, 와인과 즐기는 안주로도 언제나 환영 받는 요리다.
따뜻한 국물요리 부르기뇽
프랑스의 음식 문화에서 스튜는 큰 자리를 차지한다. 특히 사냥한 고기들을 야채와 함께 푹 끓여 먹는데 마치 보양식을 먹듯 한 그릇에 모든 영양소가 들어있다. 우리에게 애니메이션으로 친숙한 라따뚜이, 작년 겨울에 먹었지만 지금은 없어 너무 아쉬운 토끼 스튜와 함께 부르기뇽(Bourguignonㆍ레드 와인을 넣은 쇠고기 스튜)은 라플랑끄를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음식이다. 큰 밤톨만한 크기의 쇠고기 덩어리는 포크로 들어 올리는 순간 스르륵 포크 사이로 결대로 찢어지며 떨어진다. 먹어보기도 전부터 얼마나 부드러울지 기대가 된다. 부르기뇽은 레드 와인으로 끓여 보랏빛 색부터 국물의 맛까지 와인이 은은하게 느껴지는 게 특색이다. 자작하면서 걸쭉하고 진한 국물은 바게트와 먹으면 제대로 된 프랑스식 요리다. 감자, 양파, 당근, 양송이버섯 등 따뜻한 땅의 기운이 느껴지는 야채들은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에 먹는 이들의 속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도시의 삶에서 한끼란 굳이 같이 만들어 먹지 않아도 언제든지 10분만에 뚝딱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편리하게 변했다. 식사가 함께하는 시간보다는 배고픔을 채워주는 한끼가 된다는 게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안톤 셰프의 대화에서 할머니와 이모할머니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았다. 가족에게 배운 식문화는 음식에 대한 소중함과 가족에 대한 따뜻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야 만날 수 있는 먼 거리에 살지만 먹을 때마다, 만들 때마다 손끝에서 혀끝에서 할머니와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를 것이다. 기술로 배운 요리보다 어렸을 적 추억의 힘으로 나온 요리의 가치는 먹는 사람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해준다.
타드샘플ㆍ박은선 잇쎈틱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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